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한 여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툴리는 '어머니'란 세 글자가 갖는 무게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막 학교에 입학한 첫째와 둘째만으로도 버거운데, 계획에도 없던 셋째까지 태어나면서 주인공, 말로의 삶은 무척 고달파집니다. 그런 동생이 안쓰러웠는지 말로의 오빠는 동생이 밤에라도 잠시 눈을 부칠 수 있도록 나잇내니[각주:1], 툴리를 고용해줍니다. 젊고, 유능하지만 어딘가 좀 괴짜스러운 툴리가 오고나서부터 말로의 삶은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영화 속 말로가 겪는 우울감은 굳이 여성이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어머니인 '나'를 바라보는 가족, 친구들의 시선, 그리고 사회에서 바라는 어머니상까지 영화는 오늘날 어머니가 져야 할 그 깊은 무게감을 적나라고도 솔직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영화 초반의 육아 몽타주씬은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장면이지만, 관객들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명장면입니다. 끊임없이 기계처럼 유축해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나도 산후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으로 캐릭터와 함께 우울감을 느꼈다는 샤를리즈 테론의 인터뷰가 공감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되는 일들이지만, 육아는 고달픈 노동입니다. 육아에는 정답도 없고, 끝도 없으며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도 별로 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의심, 자책 만으로도 힘든데, 말로 곁에는 그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을 기대하는 주변의 시선이 그래서 말로에겐 더 차갑게 느껴지고, 화살처럼 가슴에 박힙니다.

 주변의 시선과 자괴감이 만든 악의 순환고리가 말로의 목을 옥죄여올 때 툴리가 구원자처럼 등장합니다. 툴리가 멋진 이유는 젊고 이쁜데, 육아까지 능숙해서가 아닙니다. 자신과 주변의 시선에 갖혀버린 말로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힘든건 당연하다고 말해주기 때문에 툴리가 멋진 것입니다. 말로를 '어머니'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툴리가 특별한 것입니다. 툴리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제야 말로는 자신을 압박하던 악의 순환고리를 끊어버리고, 자신이 원하던 엄마가 될 여유를 갖게 됩니다. 

 영화, 툴리의 좋은 점은 단순히 적나란 현실을 영화로 보여줌으로써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대를 조성해서 남녀관객 모두가 오늘날 어머니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 해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메리 포핀스 같았던 툴리를 단순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소모시키지 않고, 등장인물들과 관객들 모두가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끔 장치한 점은 영리하고도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주노에서 어퍼컷을 날렸지만, 영 어덜트에선 너무 과하게 느껴졌던 디아블로 코디의 솔직담백한 대사들이 다시금 맞는 옷을 입었다는 느낌입니다. 일상적이지만 대놓고 말하기 껄끄러운 소재를 특유의 블랙유머와 속시원한 대사로 풀어냄으로써 소재가 가진 무게감을 상당수 덜어냈다는 점에서 성공적입니다. 최근들어 다소 주춤했던 라이트먼 감독에게도 인 디 에어(2009) 이후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샤를리즈 테론 역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후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각본, 연출, 연기 삼박자가 모두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하의 성적과 주목을 받은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관객들이 더 이상 소규모 드라마 영화를 찾지 않는 것인지, 이런 영화가 더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1. 그냥 유모라 하기도 그렇고, 밤의 유모라 할 수도 없고.. 뭐라 번역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나잇내니 자체는 가정에 방문해서 낮밤을 못가리는 젖먹이를 밤부터 아침까지 돌봐주는 유모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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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보고왔습니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쉴 틈도 안주고 전력질주하는 통에 보고나니 제가 다 피곤하더군요. 좋은 의미로 말이죠.

 해외평들을 읽어보니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평가하는 통에 대체 무슨 의민지 궁금했었습니다. 근데, 영화를 보고나니 이 영화는 정말 페미니즘 영화가 맞습니다. (전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최근 몇년간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 강렬하고 동등하게 그려진 적이 있었나요? 실제로 남자들과 동등하게 힘으로 겨루면서 말이죠. 더군다나 액션 영화에선 킬빌 이후로 여성이 메인 타이틀롤로 나오는 영화 자체가 드물었습니다. (당장, 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보세요. 샤를리즈 테론의 얼굴이 톰 하디보다 더 잘 보입니다.) 샤를리즈 테론이 맡은 퓨리오사는 영화에서 맥스를 뛰어넘는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감정을 거의 표출하지 않고, 말수까지 적은 맥스 캐릭터 자체의 특징때문이기도 합니다.) 퓨리오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맥스보다 더 밀접하게 연결되있고, 영화에서 감정을 건드리는 역할을 맡고 있기때문에 맥스보다 더 강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게 분노의 도로는 퓨리오사의 거대한 여정처럼 보였습니다. 전반부는 과거의 자신의 '집'을 찾아떠나는 그녀의 시타델 탈출기이고, 중반부는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는데서 오는 분노와 절망이죠. 후반부 그녀는 맥스의 도움으로 '집'으로 가는 방법에는 집을 찾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집'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액션에 있어서도 퓨리오사는 맥스나 다른 남성들의 곁에 숨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맥스에게 먼저 달려드는 것도 퓨리오사고, 운전대를 잡고 전력질주하는 것도 태반은 그녀죠. 여성은 선천적으로 남성보다 약하니뭐니 퓨리오사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있고, 퓨리오사는 그것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달려듭니다.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은 그동안 액션영화에서 남성들이 늘 해오던 것들입니다. 그저 성별만 바꾸었는데 이렇게 신선하게 보이니 그동안 영상물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충 짐작이 가지 않나요? 안타까우면서도 이게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주인공, 맥스의 존재가 마냥 퓨리오사의 그림자에 가려진다고만 생각하진 않습니다. 맥스야말로 희망을 잃은 퓨리오사에게 최후의 기회를 제시한 장본인이고, 맥스가 없었다면 퓨리오사도 결코 임모탄조 일당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었을겁니다. 하지만, 분노의 도로가 진정한 페미니즘 영화로 발돋움하는 것은 퓨리오사 역시도 맥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퓨리오사는 완벽한 캐릭터가 아닙니다. 녹지로 돌아갈 희망만 그리면서 전력질주하지만, 녹지가 사라졌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녀는 있는 힘껏 좌절합니다. 액션신에서도 늘 모든 적의 공격을 다 피하고 천하무쌍하진않죠. 맥스는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죽어가는 그녀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함으로써 시련을 함께 이겨나가려고하죠. 맥스 자신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구요. 결국 절망하는 여자와 상처받은 남자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위험을 헤쳐나가고 희망을 쟁취하게 됩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맘에 들었던 점이 이 점입니다. 여자만세, 여자가 혼자 다하는 그런 막무가내식 페미니즘을 역설하지 않고, 당장 남자 관객이 봐도 수긍할 수 있게끔 페미니즘을 그려줬다는 겁니다. 페미니즘이 바라는 성평등도 결국 여자도 남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때로는 남성의 도움도 받으면서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자는 게 아닐까요? 맥스와 퓨리오사가 서로가 필요했던 것처럼 여성과 남성도 서로에게 똑같이 필요한 존재란 것이죠. 영화는 진정한 의미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조지 밀러 감독이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영화의 액션면에서도 그렇고, 영화의 주제나 메시지면에서도 이 영화는 정말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온갖 스턴트와 카 체이스신들로 부르는 페미니즘과 희망에 대한 찬가입니다. 가장 이질적으로 보이는 남성향 액션 시리즈와 페미니즘의 조합이라니, 그것도 70이 다 된 남자 감독에게서 탄생한 영화라는게 믿어지시나요? 분명 액션영화계에, 덧붙여서 영화사에 있어서 페미니즘에 한 획을 그을 우리 시대의 명작이 될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후속편에선 감독이 과연 어떤 비전을 보여줄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흥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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