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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19 [Review] 원더 우먼(Wonder Woman, 2017)

*본문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정말 작년 최악의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할 만한 점을 찾기 힘든 영화였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게 혹평을 피했던 인물이 원더우먼이었습니다. 하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원더우먼이 나아보였던 이유는 배트맨과 슈퍼맨이 너무 멍청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지, 원더우먼이 딱히 나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원더우먼은 비중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보여줄게 많지 않았어요.

 배트맨과 슈퍼맨이 만들어놓은 아수라장 다음에 디씨팬들이 받은 것은 다름아닌 수어사이드 스쿼드였습니다. 이쯤되면 대체 뭐하는건가 싶었고, 원더우먼 마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저 역시도 디씨+워너 브라더스 조합은 이제 그냥 믿고 버리는 카드가 되기 직전이었어요. 원더우먼은 예고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개봉일도 전혀 몰랐습니다. 앞의 두 영화가 워낙 깽판을 쳐놓은 탓에 애초에 극장에 갈 마음이 다 사라졌거든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원더우먼은 잘 나왔다는 평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고, 개봉 이후 몇주가 걸려서야 겨우 보러가게 되었습니다.

 결과물은 대만족입니다. 근래 나왔던 슈퍼히어로물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슈퍼히어로 영화여서가 아니라 그냥 영화 자체로도 원더우먼은 흥미롭고, 재밌으며,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영화 관람 전의 회의감을 싹 날려주는 정말 시원한 한 방이었습니다.

 원더우먼은 마블과 디씨가 그렇게 집착해대는 슈퍼히어로 유니버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프닝 씬에서 웨인 엔터프라이즈 트럭이 나오길래 불안했지만, 액자식 구성이기 때문에 오프닝 이후로 슈퍼맨 대 배트맨과 연관지을 만한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니버스 영화에서 그 흔한 끼워팔기 수법도 전혀 쓰지 않구요. 이 영화는 오로지 원더우먼의 기원에만 집중합니다. 

 서사 따윈 날려버리고 속도감있는 전개에만 치중했던 잭 스나이더의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원더우먼은 보기 드물게 정통적인 영웅담 서사를 따라갑니다. 어떻게 보면 미련하다 싶을정도로 기승전결 구조를 충실히 지키는 영화입니다. 2시간 20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동안 영화는 무언가 보여주어야겠다는 조급함에 휘둘리지 않고 천천히 서사를 쌓아갑니다. 관객들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지루한 영화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영화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투자한 덕에 감정이 폭발하는 후반부 하이라이트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굉장합니다. 맨 오브 스틸, 슈퍼맨 대 배트맨만큼 화려하고 엄청난 액션씬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영화보다 원더우먼의 액션 시퀀스는 훨씬 더 인상적입니다. 원더우먼이 진정한 영웅으로 각성하기까지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 결실을 맺는 액션 씬들이 더 소중하고, 값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스티브 트레버의 안타까운 결말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목격했기 때문이지, 첫 눈에 반한 사랑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자칫하면 고리타분해 보일 수 있는 사랑과 선(善)이라는 주제의식도 영화의 우직한 태도와 상당히 잘 맞아떨어 집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이 주제의식은 원더우먼이 세상에 눈을 뜨면서 조금씩 흔들리지만, 원더우먼은 자신의 여정을 통해서 그래도 지킬만한 가치들임을 확인합니다. 영화의 끝에서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도, 그녀를 성장시키는 것도 사랑과 선에 대한 그녀의 믿음입니다. 개인적으로 개봉시기를 정말 잘 탔다고 생각하는게, 요즘처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신과 미움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사랑과 선에 대한 가치를 설파하는 슈퍼히어로라니... 굉장한 타이밍 아닙니까? 

 여권신장과 더불어 페미니즘이 헐리웃의 뜨거운 화두에 오른 상황에서 첫 여성감독의 슈퍼히어로물이라 부담이 상당 했을텐데, 정치적 올바름(PC)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점도 매우 마음에 듭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성차별적인 사회상황을 꼬집지만, 페미니즘이 영화 전면에 드러나진 않습니다. 원더우먼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힘을 합치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이지, 남자 아니면 여자, '모 아니면 도'식의 이분법적 사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원더우먼은 여성관객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모든 관객을 위한 영화입니다.

 고전 영웅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정직하고 우아한 슈퍼히어로물의 다음 여정은 어딜까요? 이 영화처럼 감정과 액션, 메시지까지 모두 잡을 수 있다면 원더우먼 시리즈가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를 뛰어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P. S. : 원더우먼은 영화화가 어려운 코믹스이긴 합니다. 배트맨이나 슈퍼맨 하면 떠오르는 조커, 렉스 루터같은 네임드 빌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죠. 이번 영화에서는 빌런과의 대결보다 원더우먼을 소개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후속편 제작에 있어선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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