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 영화팬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저의 기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높았습니다.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 일까요? 영화를 보고난 뒤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입니다. 사전지식이 충분하다면 이 영화의 여러가지 레퍼런스들을 즐기며 감탄을 연발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은 영화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전 타란티노 영화들이 오마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긴 했지만, 오마쥬는 보너스 개념이었지 영화 자체를 즐기는데 관여하진 않았습니다. 반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관객들이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에 대한 사전지식을 구비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주제를 정하고, 내용을 전개해나갑니다. '폴란스키가 살인사건'만 해도 관객의 부담이 상당한데 여기에 '60년대 할리우드'라는 배경이 갖는 중요성마저 상당히 큽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두고 타란티노가 60년대 할리우드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9년을 살아가는 관객들 중 이 테마에 공감할 수 있는 관객들이 몇이나 될까요? 영화내에는 60년대 영화와 TV쇼에 대한 레퍼런스가 넘쳐납니다. 이러한 레퍼런스들은 영화학도나 평론가가 아닌 이상 100% 이해가 힘듭니다. 60년대 헐리우드 영화나 TV쇼가 현재만큼 전세계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상황을 감안하면 60년대를 보낸 한국노인들도 이 영화에 공감하긴 힘들거예요. 영화내에서 당시 시대상이나 무비 메이킹에 대해 최선을 다해 설명해주긴 하지만 관객들이 바란것은 '타란티노 영화'이지 '타란티노의 영화사 해설'이 아닙니다. 결국 영화는 초반부부터 지루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메인 이벤트인 찰스 맨슨의 스토리라인은 사전지식 문제와 별개로 메인 스토리라인을 계속 겉돌기 때문에 재미가 떨어집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초중반 찰스 맨슨 패밀리가 찔끔찔끔 등장하며 떡밥을 뿌려대다가 후반부 주인공 일당과 엮이면서 3막을 장식하는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초중반에 이 두 스토리라인이 너무 따로 놀다보니 3막에서 메인 스토리라인과 합쳐지는 과정도 이전 타란티노 영화들처럼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시원함이 부족합니다.[각주:1] 영화적 구성에서 영리함과 재치를 잃어버리니 타란티노만의 개성도 죽고, 퇴보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서 찰스 맨슨 사건을 끌어온 이유가 찰스맨슨 사건을 통해 60년대 미국의 이상주의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이 사건이 미국 사회문화 전반에 끼친 충격여파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 주제의식 측면에서 60년대 할리우드란 배경과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은 훌륭한 조합이라 생각하지만, 주제의식을 구현하는 영화 속 실행과정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지루한 초중반을 견딘 관객들한테 후반부가 팡 터져줘서 카타르시스라도 느끼게 해줬어야했는데 이번 영화는 그마저도 신통치가 않습니다. 후반부가 그나마 우리가 익히 알고있던 타란티노 영화의 진수에 가장 가깝긴 하지만, 타란티노의 장기인 인물들의 맛깔스런 대화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서스펜스도 예전같지 않습니다.

 타란티노 감독은 드물게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모두 만족시켰던 감독입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그는 그 균형을 깨뜨리고 좀 더 편향적인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어차피 영화란 주관적인 매체이니 그의 선택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겁니다. 하지만, 대중의 입장에서 섭섭함을 숨기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1. 3막에서 시전되는 '비틀기'는 철저히 관객들의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에 대한 사전지식에 의존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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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장고: 분노의 추적자 이후 3년만에 돌아온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 8을 보고왔습니다. 개봉 전부터 대본유출로 인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작품인데, 우여곡절끝에 빛을 보게된 사연많은 작품이죠. 서부극을 좋아하지 않지만, 단지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개봉하자마자 고민없이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전작, 장고: 분노의 추적자로 서부극마저 타란티노가 만들면 다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타란티노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수다스러운 악당과 재치있는 유머, 화끈한 액션은 여전합니다. 다만 이번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등장인물 전체가 그 '수다스러운 악당'들이란거죠.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각주:1] 헤이트풀 8의 주요등장 인물 전원은 악당입니다. 따라서 기존 그의 작품들처럼 악당과의 대결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할 때 얻는 통쾌함[각주:2]은 사라졌다고 보셔도 됩니다. 대신 이 공백을 채우는 것은 악당들 사이의 속내를 추리하는 두뇌싸움입니다. 헤이트풀 8은 서부극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결국은 타란티노식 추리극입니다. 각자 다른 꿍꿍이를 가진 사람들이 눈보라때문에 외딴 여관에 고립된다는 설정부터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연상시키지 않나요? 물론 살인과 범인찾기는 타란티노식 유혈이 낭자하는 잔혹한 살인게임입니다. 문제는 이 추리극식 재미가 궤도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거죠. 왠지 모르겠지만, 이번 영화 초반부 타란티노의 유머는 전작들보다 상당히 적중률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여전히 어처구니 없고 웃기긴한데 이것 역시 후반부가 훨씬 좋아요. 결과적으로 인물들을 소개하고 본격적인 배경을 설정, 준비하는 1장과 2장은 지루해져 버렸습니다. 처음으로 이 감독 영화에서 쓸떼없이 길다고 느껴졌습니다. 더군다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남북전쟁, 인종차별의 정서는 우리나라에서 딱히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가 아니다보니 한국인 입장에서 완전히 이해하고 재미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등장인물들이 여전히 매력적이긴합니다. 사무엘 잭슨은 장고에 비하면 착해보일정도로 그나마 덜 악한(...) 워렌 소령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고, 유일한 홍일점인 제니퍼 제이슨 리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속내를 알 수 없는 질척거리는 악녀연기를 선보입니다. 하지만 제일 재밌었던 캐릭터는 단연 월튼 고긴스가 맡았던 크리스 매닉스입니다. 첫등장에서 그냥 허풍만 잔뜩 든 멍청이 역할로 보였던 매닉스는 관객들의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이죠. 사악하기 짝이 없는 증오의 8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묘수를 부린건 지, 단순히 운이 정말 좋은 인물인지 끝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매닉스란 인물은 끊임없이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영화는 결국 맥거핀처럼 그의 정체에 대해 아무런 답 없이 결말이 나버리기 때문에 더욱더 미궁속으로 빠지는 캐릭터기도 하고요. 

 결론적으로 헤이트풀 8은 감독의 전작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압도해서 끌고가는 힘은 부족합니다. 이 점이 정말 아쉽긴 하지만, 영화의 멋진 후반부를 보면 역시 좋은 의미로 '전형적인' 타란티노식 영화기도해요. 왁자지껄한 수다판 분위기로 서부극과 정통 추리극, 스플래터 영화를 짬뽕할 수 있는 감독은 타란티노 밖에 없고 그 유일성은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 P. S.: 캐스팅이 정말 좋았던 영화지만, 조디역의 채닝 테이텀은 좀 별로였습니다. 감독 의도는 히어로/선역만 맡은 배우를 써서 의외성을 주려고 한 거지만, 영화 속 조디가 너무 조금 등장하기도 하고, 채닝 테이텀의 연기가 사악한 갱 보스로 보이기엔 너무 위협적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자막에는 계속 조디가 데이지의 '오빠'라고 하는데 아무리봐도 조디가 동생이지 어떻게 오빠란겁니까?(...)

  1. 헤이트풀 8이라니.. '증오의 8인'이란 제목이 훨씬 더 낫습니다. 마케팅팀은 제목에 영어쓰면 쿨해보일거란 멍청한 생각은 이제 좀 접어두면 좋겠어요. [본문으로]
  2. 늘 그랬거나, 완전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전작들은 권선징악에 충실했었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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