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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25 [Reveiw] 성인들을 위한 잔혹동화, 크림슨 픽(Crimson Peak, 2015)

*본문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올 하반기 기대작 중 하나였던 크림슨 픽을 보고왔습니다. 영화는 온전히 감정을 엔진으로 움직이는 영화입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지난 공포영화들을 보셨던 분들은 아마 짐작이 가실 겁니다. 델 토로 감독의 공포영화들을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재밌게 보실 수 있을거예요. 크로노스나 판의 미로와 어느정도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 비감이 서려있는 결말도 여전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영화 속 로맨스가 얕게 다뤄져서 앞서 언급한 작품들만큼의 감정의 울림은 없습니다. 이 점이 가장 아쉬운 점이예요. 주인공 이디스와 토마스의 사랑은 그냥 보다보면 이해는 가는데 '진짜' 사랑이라고 느끼기엔 무엇인가 부족합니다.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남여주인공의 로맨스같달까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동기와 이유는 제시되는데 정작 현실적으로는 좀 이해되지 않는.. 그런류의 로맨스입니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막판 둘의 사랑으로 갈등(...)이 해결된다는게 좀 납득하기가 힘들죠. 감정으로 움직이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 부족하다보니 영화 자체가 조금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고 즐기면 크림슨 픽은 괜찮은 영화입니다. 로맨스는 깊이가 없을뿐이지 실소나올 정도로 납득불가능한 수준은 절대 아닙니다. 로맨스와 거의 대등하게 공포가 적절히 배분되어있고 영화 후반은 거의 샤프가 남매의 숨겨진 의도를 추리하는데 소비하고 있어요. 정통 스릴러/호러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터라 지나치게 정직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준수한 수준의 긴장감을 잘 유지합니다. 요근래 하도 멍청한 호러영화가 많이 나와서 오히려 크림슨 픽은 괜찮은 편이예요. 괜히 쓸데없이 음향만으로 관객들을 기만하는 술수따위를 남발하지 않습니다. 후반부 이디스와 루실의 결전도 그렇게 차근차근 쌓아온 긴장감을 잘 터뜨려줬고 너무 급작스러운 것만 제외하면 결말도 괜찮은 편이죠. 

 크림슨 픽은 이디스가 쓴 소설, 크림슨 픽의 책이 닫히면서 끝나게 됩니다. 판타지와 호러, 로맨스가 홉합된 정통 고딕 로맨스에 대한 헌사같은 영화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이 문학적 비유가 굉장히 잘 맞아떨어져요. 고딕 로맨스를 잘 모르는 저에게 영화는 한편의 동화같은 느낌이었기에 '책'으로 영화를 표현한 것이 정말 맘에 들었습니다. 정직한 주인공과 뚜렷한 기승전결, 주인공을 돕는 유령들, 권선징악적 결말.. 과장되고, 독특하면서 기괴한 아름다움을 마구 뽐내는 영화 속 미술, 의상, 세트는 마치 그림동화집 삽화를 연상시키는 점도 있고.. 전 영화의 이런 동화적 매력에 매료돼서 오히려 앞서 언급한 단점들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화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동화의 주제와 느낌을 읽는 것이지 현실을 읽진 않으니까요. 전 이런 매력에 대한 호불호가 크림슨 픽에 대한 관객들의 상반된 평가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크림슨 픽은 결코 델 토로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헐리웃에서 R등급 고딕로맨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그의 배짱이 드러나는 영화예요. 그만큼 자신만의 매력으로 관객들을 어필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번 작품이 흥행면에선 상당히 고전한 걸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애초에 이런 영화가 제작될 수 있다는 것에 저는 감사합니다. 속편과 리메이크 열풍에 찌든 헐리웃의 안일한 태세 가운데에도 아직은 크림슨 픽과 같이 대담한 시도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으니까요. 여러모로 흥행 실패가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운 작품입니다. 


+ P. S. : 감상하면서 등급면에서 타협을 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어요. 물론 근친상간적 결말부분에선 더 이상 할말이 없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이나 공포는 충분히 톤다운 가능한 수준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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