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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29 [Making of] 프리다(Frida, 2002)와 하비 와인스타인

 2002년 개봉되어서 셀마 헤이엑을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려주었던 영화, 프리다를 기억하시나요? 개인적으로 프리다 칼로와 배우, 셀마 헤이엑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작품이라 기억하고 있던 작품인데,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다름아닌 하비 와인스타인이었다고 합니다. 미 투 캠페인이 한창이었던 지난해 말, 셀마 헤이엑이 프리다를 제작하면서 겪었던 일을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습니다.

 셀마 헤이엑의 에세이를 읽으며 정말 영화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별의별 일이 다있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여성 배우이자 제작자로서 셀마 헤이엑이 거친 고초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에세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작품의 뒷 이야기와 여성 배우, 제작진들의 고초를 되새겨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에세이 내용 일부를 조금 요약해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셀마 헤이엑은 오래전부터 편견에 맞서 싸웠던 모국의 대표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전기영화는 그녀에게 패션 프로젝트(Passion Project)였던 셈이죠. 원래 셀마는 다른 제작사와 프리다 칼로 전기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와인스타인 형제가 창립했던 미라맥스사는 고 퀄리티의 수작들을 선보이며,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위험도 감수하는 진취적인 태도 때문에 많은 제작자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영화사였습니다. 셀마 역시 미라맥스와 함께 프리다 칼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었고, 싸움도 마다하지 않은 덕에 급기야 프리다 칼로 프로젝트를 미라맥스와 함께 하게 됩니다.

 당시 셀마는 하비 와인스타인의 악명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현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셀마는 자신이 하비에게 강간당하지 않은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 조지 클루니와의 우정 덕이었다고 합니다.[각주:1] 

 미라맥스와의 계약에서 셀마의 프리다 출연료는 당시 영화배우조합이 규정한 최저임금+10%에 불과했고, 프로듀서직으로는 크레딧에 이름만 올리고 한푼도 받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각주:2] 프리다 외에도 미라맥스가 제작하는 영화들에 출연하는 조건도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셀마도 업계에서 알아주는 미라맥스사, 하비 와인스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임금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계약 이후 하비 와인스타인은 숱한 여배우들에게 그랬듯 샤워를 같이하자, 마사지를 해달라는 둥 별 말도 안되는 온갖 요구를 해왔고, 셀마는 뒤늦게 미라맥스와의 계약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녀도 뒤늦게 프리다 프로젝트를 미라맥스에서 되찾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셀마의 계속된 거부에 격노한 하비 와인스타인은 프리다 전기영화를 엎어버리려고 짧은 기한을 두고 말도 안되는 네 가지 요구를 하게됩니다.

1. 추가예산 없이 각본을 고쳐올 것.

2. 영화제작 예산 1000만 달러를 만들어올 것.

3. A급 감독을 데려올 것.

4. 네명의 조연에 유명배우를 캐스팅 해올 것.

 셀마는 이 말도 안돼는 조건을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배우 에드워드 노튼이 크레딧에 이름도 올리지 않은채 몇번이고 각본을 손봐주었고, 친구의 도움으로 1000만 달러를 만드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줄리 테이머 감독이 감독직을 수락했고, 친구인 안토니오 반데라스, 에드워드 노튼, 애슐리 쥬드[각주:3]가 군말없이 조연으로 출연해주었습니다. 배우 제프리 러쉬는 셀마 헤이엑과 친분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배역을 수락해줬다고 해요.

 셀마 헤이엑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자 어쩔 수 없이 하비 와인스타인도 약속을 지킬 수 밖에 없었고 프리다 영화는 제작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촬영이 들어간 뒤로 성폭력은 멈추었지만, 하비 와인스타인의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셀마와 제작진 모두가 매일 그 대가를 치뤄야했구요. 

 하비 와인스타인은 지속적으로 세트장에 나타나서 땡깡을 부렸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트레이드 마크인 갈매기 눈썹을 두고 딴지를 건다던지, 셀마 헤이엑의 연기에 트집을 잡는 식으로요. 세트장에 셀마 헤이엑만 남겨두고 제작진을 모두 내보낸 뒤 셀마 헤이엑이 가진건 섹스어필 뿐인데 이 영화엔 그게 없다는 식으로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셀마 헤이엑은 무엇보다도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아티스트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에 정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셀마 헤이엑은 하비 와인스타인이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역량을 봐주길 원했습니다. 실제로 셀마 헤이엑은 프리다 칼로 영화를 위해서 프리다 칼로의 실제 작품들의 사용권리를 따오고, 이전까지 촬영이 허용되지 않았던 프리다 칼로의 저택과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등 다양한 로케이션을 섭외하는 등 프로듀서로서 영화 제작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노력은 하나도 봐주지 않은채 영화와 전혀 무관한 섹스어필만 지적하는 하비 와인스타인의 태도는 셀마 헤이엑이 스스로 프로듀서로서, 배우로서 자신의 자질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의 방해는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촬영이 5주차쯤에 들어갈 때쯤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영화를 마저 완성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그가 내세운 것은 레즈비언 섹스씬이었습니다. 이전에도 하비 와인스타인은 끊임없이 섹스씬을 추가할 것을 요구 해와서 줄리 테이머 감독과 협상하는 식으로 넘긴적이 있지만, 레즈비언 섹스씬을 요구할 때는 셀마 헤이엑도 더이상 선택권이 없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영화를 엎을 기세였기 때문에 셀마 헤이엑도 결국은 그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프리다는 열정과 시간을 쏟아부은 소중한 영화였기에 엎어지는 걸 지켜볼 순 없었기 때문이죠. 이미 5주간의 촬영이 끝난 시점이었기에 제작진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영화가 엎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결국 셀마 헤이엑은 말도 안되는 섹스씬 촬영을 위해 제작진을 설득하게 됩니다.

 문제의 장면 촬영 당일, 셀마 헤이엑은 배우 인생 처음으로 무너졌습니다. 셀마 헤이엑을 무너뜨린 것은 벗어야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하비 와인스타인을 위해 벗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비와 자신 사이의 일을 제작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작진은 셀마가 갑자기 울고 불고 하는 모습에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진정제를 복용하고 나서야 겨우 촬영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촬영기간이 모두 끝나고 셀마 헤이엑은 감정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영화의 후반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첫 편집본을 감상후 셀마 헤이엑에게 영화가 극장에 걸릴 정도로 완성도 있진 않다며 극장 상영없이 바로 비디오로 직행 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줄리 테이머 감독이 그와 맞서 싸운덕에 프리다는 겨우겨우 테스트 스크리닝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프리다는 테스트 스크리닝에서 이례적으로 좋은 점수를 얻었고, 이에 하비 와인스타인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스크리닝 당일날 극장앞에서도 하비 와인스타인이 줄리 테이머 감독에게 소리지르는 모습이 포착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좋은 반응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도 프리다의 제한개봉을 허락해주었습니다. LA 두 개 극장에서 개봉된 프리다는 이후 상영관을 늘려가며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또다른 성공을 안겨줍니다. 하비의 지지 없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의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프리다는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분장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성공합니다. 영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하비 웨인스타인은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에세이 내용이 긴 관계로 모든 내용을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프리다 영화 제작에 관한 내용 위주로 추렸습니다. 셀마 헤이엑의 에세이 전문을 읽고 싶으신 분은 링크(클릭)에 접속하시면 됩니다.


  1. 둘이 셀마의 뒤를 봐주었다는 뉘앙스입니다. [본문으로]
  2. 90년대 여성 프로듀서들에게 횡횡한 관행이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3. 애슐리 쥬드 역시 하비 와인스타인의 대표적인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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