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은 한 여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툴리는 '어머니'란 세 글자가 갖는 무게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막 학교에 입학한 첫째와 둘째만으로도 버거운데, 계획에도 없던 셋째까지 태어나면서 주인공, 말로의 삶은 무척 고달파집니다. 그런 동생이 안쓰러웠는지 말로의 오빠는 동생이 밤에라도 잠시 눈을 부칠 수 있도록 나잇내니[각주:1], 툴리를 고용해줍니다. 젊고, 유능하지만 어딘가 좀 괴짜스러운 툴리가 오고나서부터 말로의 삶은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영화 속 말로가 겪는 우울감은 굳이 여성이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어머니인 '나'를 바라보는 가족, 친구들의 시선, 그리고 사회에서 바라는 어머니상까지 영화는 오늘날 어머니가 져야 할 그 깊은 무게감을 적나라고도 솔직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영화 초반의 육아 몽타주씬은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장면이지만, 관객들의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명장면입니다. 끊임없이 기계처럼 유축해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나도 산후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으로 캐릭터와 함께 우울감을 느꼈다는 샤를리즈 테론의 인터뷰가 공감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되는 일들이지만, 육아는 고달픈 노동입니다. 육아에는 정답도 없고, 끝도 없으며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도 별로 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의심, 자책 만으로도 힘든데, 말로 곁에는 그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을 기대하는 주변의 시선이 그래서 말로에겐 더 차갑게 느껴지고, 화살처럼 가슴에 박힙니다.

 주변의 시선과 자괴감이 만든 악의 순환고리가 말로의 목을 옥죄여올 때 툴리가 구원자처럼 등장합니다. 툴리가 멋진 이유는 젊고 이쁜데, 육아까지 능숙해서가 아닙니다. 자신과 주변의 시선에 갖혀버린 말로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힘든건 당연하다고 말해주기 때문에 툴리가 멋진 것입니다. 말로를 '어머니'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툴리가 특별한 것입니다. 툴리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제야 말로는 자신을 압박하던 악의 순환고리를 끊어버리고, 자신이 원하던 엄마가 될 여유를 갖게 됩니다. 

 영화, 툴리의 좋은 점은 단순히 적나란 현실을 영화로 보여줌으로써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대를 조성해서 남녀관객 모두가 오늘날 어머니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 해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메리 포핀스 같았던 툴리를 단순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소모시키지 않고, 등장인물들과 관객들 모두가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끔 장치한 점은 영리하고도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주노에서 어퍼컷을 날렸지만, 영 어덜트에선 너무 과하게 느껴졌던 디아블로 코디의 솔직담백한 대사들이 다시금 맞는 옷을 입었다는 느낌입니다. 일상적이지만 대놓고 말하기 껄끄러운 소재를 특유의 블랙유머와 속시원한 대사로 풀어냄으로써 소재가 가진 무게감을 상당수 덜어냈다는 점에서 성공적입니다. 최근들어 다소 주춤했던 라이트먼 감독에게도 인 디 에어(2009) 이후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샤를리즈 테론 역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후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각본, 연출, 연기 삼박자가 모두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하의 성적과 주목을 받은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관객들이 더 이상 소규모 드라마 영화를 찾지 않는 것인지, 이런 영화가 더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1. 그냥 유모라 하기도 그렇고, 밤의 유모라 할 수도 없고.. 뭐라 번역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나잇내니 자체는 가정에 방문해서 낮밤을 못가리는 젖먹이를 밤부터 아침까지 돌봐주는 유모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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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영화전문 사이트, 콜라이더(Collider)에 실린 사설 중 공감가는 사설이 있어서 번역해봅니다. 어느정도 의역이 있음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영화들은 과대평가 되었다 

맷 골드버그, 3. 8. 2018


 영화를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평론가들의 그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영화를 '신선함' 또는 '썩음'으로 분류하는 로튼 토마토의 성공은 이러한 관념을 더욱 굳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질은 그렇게 간단한 평가만으로 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이건 좋은 영화가 아니다"라고 치부한다면 영화가 가진 뉘앙스나 특이점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단순히 '좋은' 영화라고 꼬리표를 붙이는 행위는 그 영화가 그저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쾌하지 않고', '안전한' 영화라고 생각하게 만들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을 불쾌하지 않게하는 영화들과 실패할 여지가 없는 영화들만 존재한다면, 항상 성공적이진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고 볼 가치가 있는 영화들은 설 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지난 주, 20세기 폭스사는 레드 스패로를 공개했습니다. 이 영화는 로튼 토마토에서 49%의 신선도를 기록했고, 시네마스코어[각주:1]에선 B를 받았습니다. 박스오피스에서는 1,700만 달러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레드 스패로는 액션 영화로 마케팅 됐지만, 실제 영화는 액션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공개된 예고편을 보면 반야(마티아스 쇼에나에츠)가 도미니카(제니퍼 로렌스)에게 "넌 재능이 있어. 생존하는 법을 알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그의 대사는 "넌 사람들을 꿰뚫어 볼 줄 아는군. 늘 다른 사람보다 한 발 앞서는구나."였습니다. 레드 스패로의 예고편은 섹스와 폭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명백하게 팔리는 요소들이니까요. 하지만, 레드 스패로는 섹스와 폭력에 관한 영화가 아닙니다. 명백히 말해, 20세기 폭스사는 (헝거 게임 후속편들을 감독한) 프란시스 로렌스에게 2시간 20분이나 되는 성폭력에 관한 영화를 만들게 놔뒀습니다. 스파이 장르 요소를 갖고 있긴하지만, 레드 스패로를 액션 스릴러로 보긴 어렵습니다. 레드 스패로는 어려운 영화입니다. 늘상 먹히는 영화는 아니죠. 하지만, 이런 영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레드 스패로의 존재는 지난해 2월 폭스가 내놓은 또다른 기이한 영화, 더 큐어[각주:2]를 생각나게 합니다. 더 큐어의 시사회에 갔을 때, 저는 영화가 2시간 26분이나 된다는 소리를 듣고, "말도 안돼! 폭스사가 고어 버빈스키에게 4,000만 달러를 주고 2시간 반이나 하는 공포영화를 만들게 해줬을리가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폭스사는 그랬습니다! 그 영화는 미친 영화였어요! 더 큐어도 늘상 먹힐만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세가지 스토리라인이 하나로 충돌하고, 놀라울 정도로 이상했지만, 떨쳐버리기 힘들고, 시각적으로 황홀한 영화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모든 것이 효과적이진 않았지만, 버빈스키가 어쨌든 그런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습니다. 더 큐어는 로튼 토마토에서 42% 신선도를 기록했고, 시네마 스코어에서는 C+를 받았습니다.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2,600만 달러밖에 수익을 내지 못했죠. 숫자로만 보면 더 큐어는 '실패작'입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평가는 패스할만하다고 여겨지는 영화들보다 버빈스키의 영화가 더 강렬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짓입니다.

 로튼 토마토 사이트를 둘러보신다면, 86%의 '신선함' 평가를 잘 유지하고 있는 다키스트 아워를 보실 수 있을겁니다. 다키스트 아워는 3,000만 달러 예산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1억 3,500만 달러의 전세계 수익을 올렸습니다. 현 추세로 봐서는 오스카 남우주연상과 분장상도 따놓은 당상으로 보입니다. 다키스트 아워는 브루노 델보넬의 환상적으로 촬영이 돋보이는 처칠 전기영화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봤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큰 인상을 받진 못했습니다. 좋은 영화긴 하지만, 조 라이트 감독의 전작인 오만과 편견이나 한나처럼 관객을 끌어당기는 맛은 없었습니다. 딱히 어느것도 지적할만한 점이 없는 탄탄한 영화지만, 멋진 촬영과 강렬한 주연진의 연기를 제외하면, 다키스트 아워는 잊어버리기 쉬운 영화입니다. 물론, 조 라이트 감독은 감독의 야심과 기이함이 조화롭지 못한 실패작, 팬과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말이죠.

 영화를 '좋다', '나쁘다'로 단순히 구분짓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주목할 만한 나쁜 영화들을 지나치게 합니다. 애초에 '나쁜' 영화란 없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로튼 토마토의 신선도 같은) 숫자는 당신에게 성공적이지 않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재미나 흥미로운 점들까지 담지 못합니다. 지난해 개봉했던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는 문제점이 많은 영화였습니다. 끔찍한 캐스팅과 긴 상영시간, 주인공 밸런스도 나빴고, 스토리는 큰 문제들로 점철돼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주정거장이 '천 개 행성의 도시'인 '알파'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 오프닝 크레딧 씬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단편영화 수준이었습니다. 대화도 거의 없이, 인류와 종들이 더 크고, 발전된 세계를 위해 협력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특수기술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차원에서 펼쳐지는 소동극을 보여준 '빅 마켓' 시퀀스도 매우 기발했습니다. 발레리안은 로튼 토마토에서 49% 신선도를 받고, 시네마스코어에서는 B-를 기록했습니다. 영화는 1억 7,75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는 고작 2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쳤습니다.

 이런 영화들을 제가 보다 편한 위치에서 관람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평론가 시사회를 통해서 저는 레드 스패로와 더 큐어, 발레리안을 남들보다 더 일찍, 공짜로 볼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관객들은 무비패스[각주:3]를 가지고 있거나,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고 극장까지 갈 시간과 열의가 없다면 힘들일이죠. 평범한 관객들에게 모든 영화는 일종의 도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데 그만큼 관객들의 돈과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블랙 팬서와 같은 영화는 상대적으로 도박성이 낮은 영화라 볼 수 있습니다. 마블 영화는 계속해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고, 영화는 꽤 괜찮아 보이며, 로튼 토마토에서 97% 신선도를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블랙 팬서를 싫어하게 되더라도, 그 영화가 좋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충분할 겁니다. 더 큐어와 비교해보면, 데인 드한 주연[각주:4]에, 장어로 가득찬 욕조에 들어간 여자가 나오고, 로튼 토마토 42% 신선도를 기록한 영화보다 블랙 팬서는 진입장벽이 훨씬 낮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컴포트존에서 벗어나서 인기에 대한 비평적 합의를 얻은 영화들보다 영화, 그 자체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더 나은 관객이 될 거라 믿습니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이나 마셜 같은 영화들이 특별히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쥬만지: 새로운 세계와 미녀와 야수 같은 블록버스터 히트물들도 잘못된 건 없죠. 너무나 많은 엔터테인먼트 선택권이 있는데, 굳이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다루는 레드 스패로 같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것이 무거운 일이란걸 이해합니다. 왜 돈을 내고, 극장에 가서, 굳이 불쾌한 경험을 하겠습니까?

 이유는 그런 영화들을 감상하는 것이 당신을 성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새로운 경험들을 시도해봅니다. 우린 틀 속에 갇힌 사람이 되기 싫으니까요. 너무나 자주, '좋은' 영화들만 보러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도전하지 못하게 하고, 배우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입니다.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영화들에겐 늘 자리가 있을겁니다. 저 또한 빅 식이나 히든 피규어 같은 영화를 기꺼이 추천하겠어요. 하지만, 관객들이 도전하길 더 주저한다면, 우리가 그만큼 놓치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미친 것처럼 보이는 영화를 개봉주를 사수해가며 매번 보러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들에게도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환상적인 실패작, 뮤트[각주:5] 같은 영화를 아무런 리스크 없이 볼 수 있는 넷플릭스가 그런일을 시도하는데 가장 이상적이죠.

 좋은 영화들이 '좋은'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시간과 자원이 한정되있다면,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에게 가장 좋은 영화를 선택하세요. 하지만, 주말 오후에 2시간 반 정도 여유가 된다면, 당신의 컴포트 존에서 한 번쯤 벗어나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좀 더 나은 영화팬이 될 것입니다.

  1. 개봉 당일 관람객들의 평가를 기반으로 A+부터 F까지 13가지 등급으로 영화에 평가를 매기는 시장조사업체. 공교롭게도 제니퍼 로렌스가 주연했던 마더!가 F(!)를 받아 큰 화제를 모았었죠. 웬만큼 망작도 B정도 등급을 받기 때문에 F등급은 정말 특이한 케이스였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2. 원제 - A Cure for Wellness [본문으로]
  3. 매달 일정금액을 내면 극장에서 매일 한 편씩 보고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합니다. 정액제로 극장관람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본문으로]
  4. 주연 작품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어째 흥행쪽박 배우 이미지가 생긴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5. 더 문과 소스 코드를 연출했던 던칸 존스 감독의 신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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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프 오브 워터, 우리 시대에 필요했던 이야기

 제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골든 글러브때부터 시작된 미투 운동의 광풍과 작년 작품상 수상작 발표 실수를 인식해서 인지 시상식의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가라앉아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거의 모든 부문의 수상자가 미디어가 예측한 대로 맞아 떨어져서 보는 재미가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재미와 별개로 받아야할 사람들이 받았다는 점에서 이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예측하기 힘들었던 부문이 있었으니... 바로 작품상 부문이었습니다.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가 직전까지도 다수의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휩쓸면서 분위기가 쓰리 빌보드 쪽으로 기울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작품상 수상은 기분좋은 반전이었습니다. 후보작들 중 가장 감명깊게 본 작품이었고, 현재 그 어느때보다 미국이란 나라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은 분열과 증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쌓여온 인종갈등, 성차별 문제가 곪아 터지면서 위기에 직면 했고, 트럼프 취임을 기점으로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국가 내부의 분열 조짐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 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사랑과 관용을 부르짓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개봉은 그 어느때보다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주인공, 일라이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인이자 변변하게 자라지 못한 고아출신입니다. 정부 기밀기관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실험실이나 화장실을 청소하는 하찮은 일일 뿐이죠. '농아'라는 설정은 말을 할 수 있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수자들의 애환을 은유한 것일 겁니다. 델 토로 감독은 말을 할 수 없는 주인공의 한계를 활용하여 자칫 단순하게 그칠 수 있었던 사랑얘기에 풍부한 깊이를 더했습니다. 일라이자의 목소리, 행동을 대신해줄 조연캐릭터들이 바로 그 장치입니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동성애자 룸메이트(자일스), 흑인 직장동료(젤다), 러시아 스파이(드미트리). 성적지향, 인종, 국적을 상징하는 이 세 인물들은 일라이자 대신하여 그녀의 생각을 목소리와 행동으로 옮기고, 그녀와 어인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일라이자와 어인의 사랑이 영화의 중심이 되지만, 일라이자의 또다른 자아라 볼 수 있는 이 셋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전개되면서 넷의 이야기가 촘촘히 겹쳐져 결국에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젤다의 이야기가 나머지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적게 다뤄지는 점은 아쉽습니다.) 조연들의 비중이 생각 외로 높아서 어인과 이어지는 영화의 결말은 일라이자의 개인적인 해피엔딩이라기 보다 사랑의 가치를 알고있는 모두의 승리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나 악역, 스트릭랜드는 겉보기에 번지르르 하지만, 나르시즘과 오만에 빠져 자신들의 업적을 위해 희생된 수많은 '타인'을 보지 못합니다. 현 미국의 문제점도 이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이는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국수주의, 이기주의의 늪에 급속도로 빠져들고 있는 전 세계의 문제입니다.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런 국가 내부에서는 권력자들이 온갖 기준을 들이대며 국민을 억압하며, 또 국민들 사이에선 소수자를 차별하고 증오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델 토로 감독은 각자 혼자일 때는 아무런 목소리도 가지지 못하는 일라이자와 자일스, 젤다, 드미트리가 서로 힘을 합쳐 정부나 권력자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분열의 시대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넌지시 조언하고 있습니다. 감정보다 이성을 강요받는 시대에 영화는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더라도, 그 사회의 주체가 되는 인간에게 존중과 관용, 사랑이 없다면 그 무수한 발전과 영광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자 정답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감정이 이성을 앞선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워서 정답을 외치길 주저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그렇게 주저하는 사람들, 시대, 국가에게 외치는 사랑의 절규이자 찬가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절실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저는 이 영화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이 그 어느때보다 유의미한 수상이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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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두려움과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아침말이죠.

매일 아침 당신은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되지만, 그것이 당신을 규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행동에는 선과 악이 24시간 공존 하니까요.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짓느냐 입니다.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왜냐하면 사랑이 정답이니까요.

멍청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랑이야말로 모든것의 정답입니다."


지난해 토론토 영화제에서 셰이프 오브 워터 상영이후 Q&A 섹션에서 있었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발언 중 일부입니다.

저는 델 토로 감독의 이 발언이야말로 셰이프 오브 워터 영화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지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 분열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진정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

셰이프 오브 워터를 통해 델 토로 감독은 서로에 대한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할 때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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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영화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디씨 유니버스 캐릭터는 슈퍼맨입니다. 망해가는 디씨 유니버스 영화를 슈퍼맨 때문에 꼬박꼬박 다 챙겨보고 있습니다. 맨 오브 스틸은 결코 잘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어느 영화도 제대로 해낸 적이 없었던 드래곤볼풍의 초능력 대결을 구현 했다는 점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슈퍼맨의 능력을 그만큼까지 끌어낸 영화도 없었을겁니다. 하지만, 맨 오브 스틸 때부터 잭 스나이더의 슈퍼맨에 대한 묘사가 잘못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온데간데 없고 싸움하기 급급한 슈퍼맨의 모습에 실망했습니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을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는 더 설상가상입니다. 이 영화에서 슈퍼맨은 자기목적에 따라 움직이기 바쁘고,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배트맨과 치고박고 싸우죠. 화로 가득한 슈퍼맨의 모습에 한 번, 기대이상으로 멍청한 모습에 두 번 놀랐습니다.

 저스티스 리그에서는 한 술 더 떠서 부활한 슈퍼맨이 폭주해서 '분노의 화신'으로 거듭납니다. 영화가 워낙 할 말이 많다보니 금방 되돌아오긴 합니다만, 전작들에서 소홀한 캐릭터 묘사로 비판받은 통에 또 캐릭터성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설정이 눈쌀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맨 오브 스틸부터 저스티스 리그까지 슈퍼맨은 예측불가능한 대량살상무기같은 느낌입니다. 인류의 친구이자 수호자같은 슈퍼맨의 이미지는 전혀 찾을 수 없고, '분노한 신'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자극적인 묘사로 슈퍼맨의 원작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최근 영화 중에 슈퍼맨을 가장 잘 묘사한 영화는 브라이언 싱어의 2006년작, 슈퍼맨 리턴즈라고 생각합니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소외감, 슈퍼히어로가 안고 가야할 책무 등 최근 영화에서 얕게 다루어졌던 슈퍼맨의 고뇌가 세심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트릴로지의 성공요인이기도 합니다.) 캐릭터의 심리가 중심이 되다보니 영화가 자연스럽게 진지해질 수 밖에 없었고, 그저 진지한 척만 해대는 스나이더의 영화와 차별화됩니다. 

 싱어와 스나이더의 가장 큰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은 액션씬입니다. 스나이더가 액션연출면에서는 세련된 감각을 지닌건 인정하지만, 그의 영화에서는 각본보다 액션이 우선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주객이 전도된거죠. 반면 싱어는 액션을 철저히 내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합니다. 슈퍼맨 리턴즈에서 펼쳐지는 모든 액션씬은 슈퍼맨이 인간을 구하고, 보호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슈퍼맨 캐릭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애, 자비와 같은 정신과 일맥상통하고 있죠. 슈퍼히어로 대 빌런의 구도에서 벗어나 슈퍼맨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최근의 주류 슈퍼히어로물과 확실히 다릅니다. 비행기 구출씬이나 대륙을 들어올리는 씬들은 슈퍼맨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가깝기 때문에 박진감은 다소 떨어지나 여기서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온화한 신 같은 슈퍼맨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대부분 슈퍼히어로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우지만, 빌런의 실체가 그림자에 가려진[각주:1] 슈퍼맨 리턴즈에선 슈퍼히어로 개인보다 그의 사명에 더 방점이 찍히는 것이지요.

 스나이더의 영화에서 버려지다시피했던 클락 켄트와 슈퍼맨 사이의 이중생활이 잘 그려진 점도 좋습니다. 영화 속 클락 켄트는 전형적인 소시민 남자의 모습을 대변하는 캐릭터이고, 인간으로서 슈퍼맨의 면모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신과 같이 느껴졌던 슈퍼맨도 클락 켄트일때는 그저 어리숙한 쑥맥남에 불과하죠. 관객에게 그런 갭을 지켜보는 것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슈퍼히어로의 모습만 강조했던 스나이더의 슈퍼맨과 달리 싱어의 슈퍼맨에 관객들이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측면을 부여합니다. (솔직히 스나이더의 슈퍼맨에서 클락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생각없이 모성애를 들먹거리다 욕이란 욕은 다먹었던 배대슈와 달리 슈퍼맨 리턴즈가 부성애와 슈퍼히어로서의 고뇌를 성공적으로 혼합시킨 점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영화 초반 크립톤 행성을 방문한 슈퍼맨은 자신만이 유일한 크립톤의 생존자라는 씁쓸한 사실과 마주합니다. 그순간, 인간사회에서 그가 느끼는 소외감과 고독은 그가 지고가야할 십자가입니다. 그런 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막판에 밝혀지는 아들이라는 존재입니다. 조엘과 칼엘, 슈퍼맨과 아들이라는 3대에 걸친 부성애를 부각시켜 슈퍼맨이 고독을 털어버리고 희망을 찾게되는 결말은 상당히 신선했습니다. 후속편에서 슈퍼맨의 부성애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었는데 아쉬울 따름..

 슈퍼맨을 맡은 배우들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브랜든 루스가 크리스토퍼 리브의 우직하고 선한 이미지를 계승했다면, 헨리 카빌은 코믹스에서 튀어나온 듯한 우락부락한 몸매로 슈퍼맨의 '신'과 같은 면모를 과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근래 캐릭터를 다루는데 있어 슈퍼맨의 본질과도 같았던 인류애, 온정 같은 것들이 자극적인 액션에 자꾸 희석되어가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그럼 점을 염두에 뒀을 때 고전의 기품과 원작의 정수를 녹여낸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 리턴즈는 언젠가 재평가받을 이유가 다분한 훌륭한 슈퍼맨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P. S. : 로이스 레인에 대해 얘기 안하고 넘어가려니 아쉬울 것같아 덧붙입니다. 최근 디씨 유니버스에서 로이스 레인의 묘사는 정말 기대 이하입니다. 맨 오브 스틸부터 저스티스 리그까지 그 평가도 점점 낮아만지고 있죠. 매편 슈퍼맨의 발목만 잡아대는 민폐 캐릭터니 미움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슈퍼맨 리턴즈의 로이스 레인은 슈퍼맨에게 도움이 되는(!) 캐릭터입니다. 기자 다운 면모를 발휘해서 슈퍼맨이 눈치 못채는 사이 렉스 루터의 계획에 서서히 다가가고, 막판에는 슈퍼맨을 직접 구하기까지 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여자친구 역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만, 세 편이나 걸쳐 꾸준히 나쁜 모습만 보여주는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에이미 아담스란 배우에게도 이건 커리어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영화 속 렉스 루터는 초능력이나 힘을 과시할만한 무기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커튼 뒤에 숨어서 악행을 진두지휘한다는 느낌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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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영화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주의해주세요.

 일단 아미 해머의 캐스팅이 신의 한수입니다.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첫 눈에 반하는 이유를 한 번에 납득할 수 있는 캐스팅입니다. 그냥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는 미모랄까.. 아미 해머가 잘 생긴건 알고있었지만, 올리버만큼 그의 매력이 잘 드러난 캐릭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유분방하고 도발적인 미국인 손님 이미지가 배우 본인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기면에서 아미 해머보다 빛나는 것은 단연 엘리오 역의 티모시 샬라메입니다. 원작 소설과 영화 모두 철저히 엘리오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올리버는 자연스럽게 타자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만연체로 주인공(엘리오)의 심경 하나하나를 모두 풀어낸 소설보다는 어느정도 객관화된 편이지만, 영화에서도 여전히 관객이 몰입하고 공감하는 인물은 엘리오입니다. 엘리오 역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쳐냅니다.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인데,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가이드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특히 분한 듯 체념한 듯 모든 감정을 쏟아내는 결말의 여운은 그의 연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퀴어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묘사에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의 창문 밖 풍경을 비추는 구식 연출은 영화 자체의 톤과 무척 잘 어울렸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이성애 장면은 오히려 적나라게 표현돼서 조금 모순된다고 느껴졌습니다. 구아다니노 감독도 여기에 대해 감정선에 집중하느라 그랬다는 둥 변명을 하긴했지만, 섹슈얼리티가 사랑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 원작소설을 생각하면 조금 갸우뚱스럽습니다. 하지만 담백한 표현수위 덕에 좀 더 많은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표현수위 문제와 별개로 자식의 동성애를 너그럽게 보듬어주는 새로운 부모상을 보여준 점은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클 스툴바그가 연기한 특정장면(!)은 두 주인공의 애정씬보다 더 기억에 남는 명장면입니다. 이별의 슬픔마저도 포용하라는 펄먼 박사의 대사속에 이 영화의 진가가 담겨져 있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엘리오의 모습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나를 지지해줄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데서 느끼는 안도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게도 부모님이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던 적이 있어서 저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었네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첫 사랑의 추억을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입니다. 영화 속 올리버의 작은 한 마디, 작은 행동 하나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엘리오를 모습은 첫 사랑을 경험해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영화가 단순히 퀴어영화로 치부되지 않고, 이성애자, 동성애자 관계없이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속 올리버는 그저 우연히 남자였을 뿐, 엘리오에게 있어 첫사랑이란 사실은 그런 꼬리표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여름풍광과 시원스러운 사운드트랙, 첫사랑의 추억과 함께 여름이면 꾸준히 생각날 명작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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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영화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주의해주세요.

 스토커 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주인공, 잉그리드는 잡지를 통해 아름다운 인스타그램 스타, 테일러에 대해 알게됩니다. 테일러의 계정을 팔로잉하며 그녀의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을 키워가던 잉그리드는 테일러가 살고 있는 서부로 이사가기로 결심합니다. 온갖 거짓말과 스토킹을 통해 마침내 잉그리드는 테일러의 친구가 되는데 성공하게 되죠..

 테일러의 절친이 되는데 성공한 잉그리드는 테일러의 진짜 삶은 SNS에서 봤던 것만큼 마냥 장밋빛으로만 가득하진 않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생전 처음으로 우정과 유대감을 느껴본 잉그리드는 허울뿐인 소셜 스타의 삶에 도취되어 테일러의 절친으로 남기위해 발악합니다. 테일러와의 우정과 유대감은 비록 진짜가 아니지만, 잉그리드는 혼자서 외로울 바에 차라리 군중속에서의 외로움을 택한 것이죠. 잉그리드의 스토커짓을 두둔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맷 스파이서 감독은 SNS라는 현실감 있는 소재와 인간의 사랑받고 싶은 본능을 잘 혼합하여 요즘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영화 속 잉그리드의 행동은 황당하기 그지 없고 반감을 사기 딱 좋지만, SNS가 인간관계의 큰 축이 된 현대인들은 그녀를 보고 마냥 웃을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언프리티 소셜 스타는 정답을 갖고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SNS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터 가득낀 SNS 속 허울뿐인 모습보다 현실속의 진실된 자신, 인간관계가 더 소중한 것이란 걸 알것입니다. 잉그리드의 괴이한 여정 속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는 댄이 정답에 근접한 인물입니다. 댄은 인스타그램 속 잉그리드가 아닌 현실 속의 초라하지만 진실된 잉그리드의 진짜 모습을 사랑합니다. 그런 진짜배기를 못 알아보고 신기루같은 테일러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잉그리드의 모습은 조금 답답하기도 하죠. 하지만 SNS의 좋아요 하나, 팔로워 하나가 주는 쾌감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잉그리드의 선택 역시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인터넷이란 가상현실 속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자살시도후 깨어난 잉그리드의 첫 마디나, 병문안 온 댄보다 인스타그램 코멘트에 더 신경쓰는 그녀의 집착적인 행동은 헤어나올 수 없는 SNS의 중독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오늘날 진실한 인간관계를 눈앞에 두고도 못 보는 우리 시대가 가진 원시(遠視)를 뼈아프게 드러냅니다. 죽음 끝에 겨우 소생한 주인공이 인스타그램에서 다시 삶의 의미를 찾다니, 이토록 지독한 아이러니가 어딨습니까?


P. S. : 언프리티 소셜 스타라는 국내 개봉명은 영화 자체는 잘 표현했지만, 이미 한물간 (그것도 이미 종영한!) 프로그램 명을 패러디했다는 점에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국내 개봉명보다 더 심각한건 국내용 포스터(...) 힙한 북미 포스터를 버리고 스틸샷과 유행어 따위로 조악하게 꾸민 국내 포스터는 마케팅팀에게 감 한 상자 선물하고 싶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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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 영화제 때부터 보고싶었던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두 개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되었지만, 도저히 부산까지 갈 시간은 낼 수 없었기에 무척 아쉬웠는데, CGV가 프렌치 시네마 투어 2107이란 프로그램을 개최한 덕에 근방에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 독과점으로 CGV가 욕먹고 있는 상황이지만,  결국 상영 프로그램 측면에서는 경쟁사들보다 우월한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경쟁사들 역시 독과점 문제에선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3사 비교는 결국 도찐개찐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

 사족은 그만하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엔터테인먼트 관점에서 근래 감상한 에로틱 스릴러 영화 중에서 가장 재밌게 본 작품입니다. 

 에로틱 스릴러는 현재 사장 되가는 장르입니다. 2000년대 인터넷이 보급된 후 장르에 대한 수요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죠. 가끔씩 나온 장르의 후계자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근래 가장 성공한 에로틱 스릴러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는 '에로틱'이나 '스릴러'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기도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두 개의 사랑은 일단 재밌습니다. 그리고 야합니다. 관객들이 이 장르에서 기대하는 성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영화이고, 분열된 자아라는 주제의식과 그 긴장감을 성공적으로 혼합했습니다.

 남자친구, 폴에게 주인공, 클로이는 정착하고 싶어하지만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감춘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동거를 통해 폴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클로이는 남자친구 몰래 그의 형(루이스)에게 찾아가보게 되고, 둘은 위험한 관계를 시작합니다. 거침없는 성격에 사악해보이기까지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성적매력을 지닌 루이스, 착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정착하고 싶은 폴 사이에서 클로이가 방황하는 모습은 단순한 불륜 보다는 본능과 이성 사이의 갈등에 가깝습니다. 같은 모습을 가진 전혀다른 두 연인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는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상을 적절히 잘 섞어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영화가 진행될수록 현실과 판타지 사이의 경계는 점점 허물어져 가고, 그 무너지는 경계는 영화의 표현과 인식에 상당한 자유를 부여합니다. 근래 야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베드신으로 일관된 상당수 에로틱 스릴러물들과 비교할 때 두 개의 사랑이 가진 거침없는 태도는 분명 강점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영화가 가진 흡인력에 기여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영화가 진정 '스릴러'로 보일 수 있게 만든 두 배우의 표현력, 케미스트리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제레미 르니에르는 상반된 매력을 가진 쌍둥이를 훌륭하게 소화하면서 자칫하면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었던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과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클로이 역을 맡은 마린 백트입니다. 영 앤 뷰티풀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마린 백트는 눈빛만으로도 관객을 매료하는 힘을 가진 배우입니다. 굳이 벗지 않아도 충분히 섹시하고, 요즘 배우들이 갖지 못한 미스터리함을 갖춘 보기 드문 인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만의 아우라를 갖춘 배우라는 점에서 향후 대체불가능한 프랑스 대표 여배우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두 개의 사랑을 통해 영 앤 뷰티풀에 이어 그녀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의 시선에 개의치않고 자유분방하게 인간의 자아와 성에 대해 솔직하게 탐구하는 영화의 태도는 관객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말로는 더 개방되고 자유로워졌다지만 이런 영화를 보기 쉽지 않은게 현실입니다. 두 개의 사랑은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나 아까운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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