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사랑은 지난해 말인가 프렌치 시네마 투어 기획전에서 인상깊게 본 작품인데, 리뷰를 올려야지 올려야지 생각만하다 마무리를 못해 아직도 못 올리고 있네요. 

 전 영 앤 뷰티풀로 오종 감독을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되었는데, 프랑스 감독으로는 그나마 우리나라에 알려진 편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개봉안 된 영화도 많고, 인터뷰도 거의 없더군요. 아쉬운 마음에 영어로 된 인터뷰를 한번 번역해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영어권에서도 프랑스 영화 인기가 예전같지 않아서 인터뷰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아래 글은 지난해 가을 필름 스테이지와 프랑소와 오종감독이 가졌던 인터뷰를 한글로 옮긴 것입니다. 의역이 다소 가미된 점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필름 스테이지: 스위밍 풀부터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프란츠까지 정체성은 당신 영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두 개의 사랑이 기반을 두고 있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원작 속에 나타난 정체성이란 소재는 어떻게 당신의 관심을 끌게 되었나?

프랑소와 오종: 나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변화하는 캐릭터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 안 좋은 상황에 놓인 캐릭터와 영화를 시작하고 싶었고, 영화가 끝날 쯤엔 다른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캐릭터를 그리고 싶었다. 이야기의 여정 속 주인공인 클로이가 바로 그런 캐릭터다. 영화 초반 클로이는 자기 내부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쯤에 그녀는 그것을 깨닫고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된다.


필름 스테이지: 칸 영화제에서 영화를 봤다. 두 개의 사랑은 내게 이번 영화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다른 경쟁작들도 봤지만, 이 영화만큼 재밌게 보진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다른 "진지한" 영화들을 만들 때보다 재밌었나?

프랑소와 오종: 그렇다. 두 개의 사랑을 만드는 건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영화 뒤편에서 미장센이 펼쳐지는 고전 영화에 가까웠던 프란츠를 만드는 것보다 확실히 재밌었다. 나는 이번 영화가 내가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못했던 미장센의 다양한 효과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호러와 코미디, 이런 다른 장르들을 혼합해 볼 수 있었기도 하고. 그래서 내 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두 개의 사랑은 재밌는 경험이었고, 만들면서 정말 재밌었다.


필름 스테이지: 영화 촬영은 빨리 끝났나?

프랑소와 오종: 8주 동안 찍었다. 프란츠는 9주가 걸렸는데 사실 별로 차이나지 않는다. 내 영화들의 촬영기간은 대개 꽤 짧은 편이다.


필름 스테이지 : 칸 영화제와 관련해서 언론 시사회와 갈라 프리미어가 동시에 열릴 수 있도록 티에리 프레모[각주:1]가 스크리닝 스케줄 재조정을 고려한다는 얘기를 들어봤나?

프랑소와 오종: 난 몰랐었다.


필름 스테이지: 그가 이런 제안을 한 주된 이유는 부정적인 언론 반응이 프리미어 분위기를 자주 망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소와 오종: 그건 좋은 생각이다. 나는 그런 상황이 인터넷, 트위터, 페이스북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인들이 영화를 보자마자 트위터로 평을 올리곤한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와중에도 이미 평론가들이 멍청한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영화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영화를 평가할 권리는 가지고있다. 하지만, 평론가들이 자신들이 쓸 평론에 대해 충분한 시간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건 평론이라 부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평론가들도 일반 관객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난 티에리 프레모의 제안이 좋은 생각이라 생각한다.

 지난해 자비에 돌란이 초기 언론 시사회 반응으로 짓밟혔다고 알고있다.[각주:2]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쏟아부은 결과물인데, 단 1분만에 완전히 짓밟혀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칸 영화제의 반응과 일반 관객의 반응은 매우 다를 수 있다. 칸 영화제에서는 명작이라 생각했던 영화가 막상 나중에 극장에서 개봉되면 "이게?" 싶은 경우도 가끔 있지 않나. 영화제에서는 너무나 많은 영화를 보기 때문에 항상 제대로된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평론가들도 실수를 할 수 있다.


필름 스테이지: 일반적으로 볼 때 당신과 평론간의 관계는 어떤가? 당신도 평론을 읽나?

프랑소와 오종: 그렇다, 난 평론가들이 말해야 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알다시피 난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볼 영화를 만든다. 내가 생각하기에 난 그런 것들에 대해선 명확한 태도를 갖고있다고 본다. 내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숙고한 결과 나온 의견들을 신경써서 읽어보려고 한다. 작품 내 논란으로 내가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내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난 그런 극단적인 반응에 익숙하다. 그런 반응은 곧 내 작품이 그저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해주기에 난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필름 스테이지: 그렇다면 부정적인 트윗에도 상처받진 않겠다.

프랑소와 오종: 그렇다. 난 그런데 있어서 꽤 달관했다.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평론가다. 20년이 지나고나서 내 작품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보자. 나쁘다고 여겨졌던 영화가 명작으로 재평가받는 일은 꽤 자주있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를 평가할 때 시간을 어느정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필름 스테이지: 일해보고 싶은 여배우가 있나?

프랑소와 오종: 난 여배우들이 좋다. 일해보고 싶은 여배우들은 많지만, 그 배우에게 맞는 역할을 기다릴 뿐이다. 역할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적당한 역할이 있어야 그 역할에 맞는 최고의 여배우를 찾을 수 있다.


필름 스테이지: 지난 몇년간 전세계에서 양질의 LGBTQ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퀴어 시네마의 아이콘으로서 그런 영화들에 퀴어/LGBTQ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아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프랑소와 오종: 난 그런 과정이 영화가 관객을 찾는데 언제나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관객몰이가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퀴어 시네마" 라벨에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그런것에 반대하진 않는다.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테디 어워드를 수상한 것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까지 난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테디 어워드를 수상했다는 사실로 인해 퀴어 관객들에게 더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름 스테이지: 지난 몇년간 퀴어 시네마에서 당신의 이목을 끈 신인 영화인이 있었나?

프랑소와 오종: 몇주전에 파리에서 로빈 캉필로의 120BPM을 보았다. 매우 재밌게 봤다. 내가 그 시기를 겪었기에 더 인상 깊었다. 내가 ACT UP 미팅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가 그 시기를 성공적으로 영화로 옮겼다고 말할 수 있다. 로빈 캉필로의 전작 이스턴 보이즈도 정말 좋았다. 로빈 캉필로는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가장 실력있고 흥미로운 감독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필름 스테이지: 당신이 독일어도 하고, 젊었을 때는 함부르크에 있는 펜팔을 방문하기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프랑소와 오종: 사실이다.


필름 스테이지: 독일 영화 문화가 당신의 영화에 영화를 미치기도 했나?

프랑소와 오종: 영화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파시빈더[각주:3]를 발견한 것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파리 라틴지구에서 열린 파시빈더의 회고전에서 그의 모든 작품을 감상했고, 그의 강렬한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의 나라, 2차 대전이후 독일 사회에 대해 말하는 그의 영화들은 매우 진실되고 강렬했다. 파시빈더는 장르를 뒤섞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매번 같은 배우들과 함께 일해도, 작품마다 방향성은 매우 다르다. 파시빈더는 확실히 내 롤모델 중 한 명이다.


필름 스테이지: 2012년에 당신은 베를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경쟁작들을 보고나서 나는 프랑소와 오종이라면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바바라와 미구엘 고메즈의 타부를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둘 다 황금곰상은 못탔지만..

프랑소와 오종: 황금곰상 선정에 있어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두 작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사실 심사위원 경험은 좀 고통스러웠다. 심사는 민주주의지만 난 독재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에서야 말하지만 심사위원 중 나만 유일하게 터부를 지지했다. 미구엘 고메즈가 알프레드 바우어상 밖에 못받아서 꽤 화나있어서 그에게만 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내가 없었으면 아무 상도 못받았을 거라고.


필름 스테이지: 말도 안돼(...)

프랑소와 오종: 그렇다. 바바라를 가지도 심사위원들과 싸웠다. 난 바바라가 황금곰상을 받길 원했다. 내게 있어 황금곰상은 바바라와 터부 중 이중택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고, 영화제가 끝날 쯤엔 넌더리가 났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보통 난 심사위원자리는 늘 거절했는데, 그해 심사위원들은 모두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기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데 있어선) 모두 생각이 달랐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은 취향을 갖고있진 않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필름 스테이지: 그해 황금곰상은 결국 시저는 죽어야 한다에게 돌아갔다.

프랑소와 오종: 그 영화는 심사위원장이었던 마이크 리가 가장 좋아한 작품이었다. 내가 다음에는 심사위원장만 맡고 싶다 얘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필름 스테이지: 당신은 칸 영화제에서도 당신이 존경하는 영화인들이 심사위원이 되면 때때로 "의문이 드는" 결정을 내린다고 말한 적 있다.

프랑소와 오종: 내가 볼 때 올해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각주:4]은 페드로 알모도바르[각주:5]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심사위원장이 자기 선택을 강요하는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올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알다시피 수상자 선정은 싸움이다. 심사위원이 되면 마냥 기쁠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일이 엄청 많다. 수많은 논쟁과 싸움을 거쳐야한다. 제이크 질렌할과는 자주 의견이 일치했던걸로 기억한다. 헐리웃 배우인 그와 의견이 잘 맞아서 놀랐다. 그와 팀을 이뤄서 다른 심사위원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필름 스테이지: 바바라에 나온 니나 호스는 알고 있나? 언젠가 그녀와 당신이 일한다면 멋질 것 같다.

프랑소와 오종: 그렇다, 그녀를 안다. 니나 호스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가 연출을 맡은 연극에 출연했을 때 날 초대했었다. 우리는 가끔 보는 사이다. 그녀는 훌륭한 배우다.


필름 스테이지: 당신은 파시빈더의 작품을 개작(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각주:6]하거나 독일과 합작(프란츠)을 하기도 했다. 독일 소재를 다루거나 독일 제작진과 함께 일해본 경험은 어땠나?

프랑소와 오종: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은 프랑스 영화에 더 가깝다. 프랑스에서 찍었고, 미국인들이 프랑스인척 하던 40년대, 50년대 헐리웃 영화에 가깝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배우들이 독일인인척 했을 뿐. 프란츠에서 독일 제작진과 함께 일한건 좋은 경험이었다. 독일 제작진이 프랑스 제작진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꽤 놀랐을거라 생각한다. 프랑스에서는 감독의 비전이 중요하고, 모두가 (감독이 제시한) 방향을 향해 작업한다. 다른 국가에서는 늘 그렇지만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필름 스테이지: 당신은 같은 제작진과 함께 여러번 작업하고 있다. 촬영감독 요리끄 르 소[각주:7]가 그 예이다. 시트콤(1998)을 통해 당신은 감독으로, 요리끄 르 소는 촬영감독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고 알고있다.

프랑소와 오종: 그렇다. 그는 매우 좋은 촬영감독이다. 내가 알기로 요리끄 르 소는 현재 클레어 데니스와 독일에서 촬영중이다. 우리는 영화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여러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앞으로도 함께 더 작업하길 바란다. Fin.

  1. 칸 영화제 집행 위원장. [본문으로]
  2. 2016년 칸 영화제에서 자비에 돌란은 단지 세상의 끝으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면서 논란에 휩싸인 바 있습니다. [본문으로]
  3.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뉴 저먼 시네마 시네아티스트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감독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82년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본문으로]
  4. 더 스퀘어(The Square). [본문으로]
  5. 2016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 [본문으로]
  6. 파시빈더의 연극을 영화화. [본문으로]
  7. 프랑소와 오종 감독과는 스위밍 풀, 시트콤과 같은 작품에서 함께 작업한 촬영감독입니다.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등의 작품의 촬영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본문으로]
:

리틀 화이트 라이즈는 2개월에 한 번씩 발매되는 영국의 영화전문 잡지입니다.

매 호마다 한 작품의 특집으로 꾸며져 출연 배우나 감독의 인터뷰, 리뷰, 분석글까지 영화팬이라면 솔깃할만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리틀 화이트 라이즈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특유의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다양한 작가들이 그려낸 개성 넘치고 아름다운 일러스트레이션이 내용에 앞서 눈을 사로잡습니다.

영국 잡지다 보니 구매할 엄두는 별로 안나서 홈페이지(클릭)에서 눈팅이나 가끔하는 정도였는데,

 셰이프 오브 워터 이슈는 놓칠 수가 없어서 결국 직구했습니다.

다행이 홈페이지에서 해외배송까지 다 지원하는터라 배대지를 끼는 수고없이 쉽게 구입했네요.

이번 73번째 이슈는 셰이프 오브 워터 특집입니다.

리틀 화이트 라이즈의 영화 리뷰는 기대/즐거움/총평 세 가지로 나뉩니다.

별점 대신 5점 만점 점수를 매기는 식이죠.

즐거움과 총평에서 4점 이상을 기록한 영화는 '리틀 화이트 라이즈 추천' 표식을 받습니다.[각주:1]

셰이프 오브 워터는 즐거움과 총평에서 5점 만점을 기록!

맛보기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크리쳐 역을 맡은 덕 존스의 인터뷰 페이지.

특집에 선정된 영화 말고도 다른 영화들의 소개나 리뷰, 인터뷰도 함께 수록되어있습니다.

(물론, 특집에 선정된 영화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긴 합니다.)

이번 호에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의 인터뷰도 있는 것 같네요.

내용도 빨리 읽어보고 싶지만,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것 같아 일단은 영화 감상전 까진 보류..

다른 페이지나 살살 읽어볼까 싶습니다.

  1. 기대도는 말 그대로 영화 감상 전 평론가의 그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리틀 화이트 라이즈 추천'과는 무관합니다. [본문으로]
:

 2002년 개봉되어서 셀마 헤이엑을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려주었던 영화, 프리다를 기억하시나요? 개인적으로 프리다 칼로와 배우, 셀마 헤이엑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작품이라 기억하고 있던 작품인데,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다름아닌 하비 와인스타인이었다고 합니다. 미 투 캠페인이 한창이었던 지난해 말, 셀마 헤이엑이 프리다를 제작하면서 겪었던 일을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습니다.

 셀마 헤이엑의 에세이를 읽으며 정말 영화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별의별 일이 다있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여성 배우이자 제작자로서 셀마 헤이엑이 거친 고초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에세이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작품의 뒷 이야기와 여성 배우, 제작진들의 고초를 되새겨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에세이 내용 일부를 조금 요약해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셀마 헤이엑은 오래전부터 편견에 맞서 싸웠던 모국의 대표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전기영화는 그녀에게 패션 프로젝트(Passion Project)였던 셈이죠. 원래 셀마는 다른 제작사와 프리다 칼로 전기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와인스타인 형제가 창립했던 미라맥스사는 고 퀄리티의 수작들을 선보이며,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위험도 감수하는 진취적인 태도 때문에 많은 제작자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영화사였습니다. 셀마 역시 미라맥스와 함께 프리다 칼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었고, 싸움도 마다하지 않은 덕에 급기야 프리다 칼로 프로젝트를 미라맥스와 함께 하게 됩니다.

 당시 셀마는 하비 와인스타인의 악명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현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셀마는 자신이 하비에게 강간당하지 않은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 조지 클루니와의 우정 덕이었다고 합니다.[각주:1] 

 미라맥스와의 계약에서 셀마의 프리다 출연료는 당시 영화배우조합이 규정한 최저임금+10%에 불과했고, 프로듀서직으로는 크레딧에 이름만 올리고 한푼도 받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각주:2] 프리다 외에도 미라맥스가 제작하는 영화들에 출연하는 조건도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셀마도 업계에서 알아주는 미라맥스사, 하비 와인스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임금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계약 이후 하비 와인스타인은 숱한 여배우들에게 그랬듯 샤워를 같이하자, 마사지를 해달라는 둥 별 말도 안되는 온갖 요구를 해왔고, 셀마는 뒤늦게 미라맥스와의 계약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녀도 뒤늦게 프리다 프로젝트를 미라맥스에서 되찾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셀마의 계속된 거부에 격노한 하비 와인스타인은 프리다 전기영화를 엎어버리려고 짧은 기한을 두고 말도 안되는 네 가지 요구를 하게됩니다.

1. 추가예산 없이 각본을 고쳐올 것.

2. 영화제작 예산 1000만 달러를 만들어올 것.

3. A급 감독을 데려올 것.

4. 네명의 조연에 유명배우를 캐스팅 해올 것.

 셀마는 이 말도 안돼는 조건을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배우 에드워드 노튼이 크레딧에 이름도 올리지 않은채 몇번이고 각본을 손봐주었고, 친구의 도움으로 1000만 달러를 만드는 것도 성공했습니다. 줄리 테이머 감독이 감독직을 수락했고, 친구인 안토니오 반데라스, 에드워드 노튼, 애슐리 쥬드[각주:3]가 군말없이 조연으로 출연해주었습니다. 배우 제프리 러쉬는 셀마 헤이엑과 친분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배역을 수락해줬다고 해요.

 셀마 헤이엑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자 어쩔 수 없이 하비 와인스타인도 약속을 지킬 수 밖에 없었고 프리다 영화는 제작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촬영이 들어간 뒤로 성폭력은 멈추었지만, 하비 와인스타인의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셀마와 제작진 모두가 매일 그 대가를 치뤄야했구요. 

 하비 와인스타인은 지속적으로 세트장에 나타나서 땡깡을 부렸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트레이드 마크인 갈매기 눈썹을 두고 딴지를 건다던지, 셀마 헤이엑의 연기에 트집을 잡는 식으로요. 세트장에 셀마 헤이엑만 남겨두고 제작진을 모두 내보낸 뒤 셀마 헤이엑이 가진건 섹스어필 뿐인데 이 영화엔 그게 없다는 식으로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셀마 헤이엑은 무엇보다도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아티스트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에 정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셀마 헤이엑은 하비 와인스타인이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역량을 봐주길 원했습니다. 실제로 셀마 헤이엑은 프리다 칼로 영화를 위해서 프리다 칼로의 실제 작품들의 사용권리를 따오고, 이전까지 촬영이 허용되지 않았던 프리다 칼로의 저택과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등 다양한 로케이션을 섭외하는 등 프로듀서로서 영화 제작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노력은 하나도 봐주지 않은채 영화와 전혀 무관한 섹스어필만 지적하는 하비 와인스타인의 태도는 셀마 헤이엑이 스스로 프로듀서로서, 배우로서 자신의 자질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의 방해는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촬영이 5주차쯤에 들어갈 때쯤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영화를 마저 완성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그가 내세운 것은 레즈비언 섹스씬이었습니다. 이전에도 하비 와인스타인은 끊임없이 섹스씬을 추가할 것을 요구 해와서 줄리 테이머 감독과 협상하는 식으로 넘긴적이 있지만, 레즈비언 섹스씬을 요구할 때는 셀마 헤이엑도 더이상 선택권이 없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영화를 엎을 기세였기 때문에 셀마 헤이엑도 결국은 그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프리다는 열정과 시간을 쏟아부은 소중한 영화였기에 엎어지는 걸 지켜볼 순 없었기 때문이죠. 이미 5주간의 촬영이 끝난 시점이었기에 제작진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영화가 엎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결국 셀마 헤이엑은 말도 안되는 섹스씬 촬영을 위해 제작진을 설득하게 됩니다.

 문제의 장면 촬영 당일, 셀마 헤이엑은 배우 인생 처음으로 무너졌습니다. 셀마 헤이엑을 무너뜨린 것은 벗어야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하비 와인스타인을 위해 벗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비와 자신 사이의 일을 제작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작진은 셀마가 갑자기 울고 불고 하는 모습에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진정제를 복용하고 나서야 겨우 촬영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촬영기간이 모두 끝나고 셀마 헤이엑은 감정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영화의 후반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첫 편집본을 감상후 셀마 헤이엑에게 영화가 극장에 걸릴 정도로 완성도 있진 않다며 극장 상영없이 바로 비디오로 직행 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줄리 테이머 감독이 그와 맞서 싸운덕에 프리다는 겨우겨우 테스트 스크리닝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프리다는 테스트 스크리닝에서 이례적으로 좋은 점수를 얻었고, 이에 하비 와인스타인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스크리닝 당일날 극장앞에서도 하비 와인스타인이 줄리 테이머 감독에게 소리지르는 모습이 포착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좋은 반응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도 프리다의 제한개봉을 허락해주었습니다. LA 두 개 극장에서 개봉된 프리다는 이후 상영관을 늘려가며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또다른 성공을 안겨줍니다. 하비의 지지 없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의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프리다는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분장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성공합니다. 영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하비 웨인스타인은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에세이 내용이 긴 관계로 모든 내용을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프리다 영화 제작에 관한 내용 위주로 추렸습니다. 셀마 헤이엑의 에세이 전문을 읽고 싶으신 분은 링크(클릭)에 접속하시면 됩니다.


  1. 둘이 셀마의 뒤를 봐주었다는 뉘앙스입니다. [본문으로]
  2. 90년대 여성 프로듀서들에게 횡횡한 관행이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3. 애슐리 쥬드 역시 하비 와인스타인의 대표적인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본문으로]
:

*본문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30년 만의 속편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공석은 헐리웃의 새로운 작가주의 감독으로 떠오르는 드니 빌뇌브 감독이 채웠습니다. 그을린 사랑, 시카리오 등에서 펼쳤던 드니 빌뇌브 감독의 개성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특유의 느리고 정적인 연출, 천천히 끓어오르는 분위기는 블레이드 러너의 필름 누아르적 특성과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그 만듦새가 훌륭함은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족스런 영화는 아닙니다. 가장 큰 불만은 재미가 없었다는 것. 이건 개인의 취향입니다만,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연출은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습니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심리적인 피로감을 주는 연출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긴 영화의 러닝타임까지 겹치니 후반부까지 관객이 집중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밀도있게 편집 했다면 싶은 아쉬움이 듭니다. 지루하진 않았지만, 2시간 40분이란 러닝타임 내내 흥미롭게 보진 못했습니다.

 더욱 아쉬운 점은 이번 속편만의 매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블레이드 러너(1982)가 엄청 재밌는 영화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 영화 역시 모두를 위한 재밌는 영화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는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시각적인 혁명, 매력적인 캐릭터들, 영화가 끝나도 관객들이 파고들만한 질문이 가득했습니다.

 시각적인 측면에서 SF영화의 레퍼런스가 된 전편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번 속편에 불만은 없습니다. 전편에 기초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최선을 다했고, 로저 디킨스는 충분히 인상적인 장면들을 찍어냈습니다. 전편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은 없었지만, 디스토피아 미래의 새로운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제 몫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는 것은 문제입니다. 새로운 주인공, 케이는 전형적인 누아르 영화의 형사 캐릭터입니다. 레플리칸트라는 설정덕에 차별점이 생기긴 했지만, 영화 내내 그가 하는 행동들은 예측가능하며 후반부 반전과 함께 주변부 인물로 밀려나기 때문에 상당부분 힘을 잃습니다. 인간보다 인간적인 레플리칸트란 점에서 영화의 주제에 맞닿아 있는 인물이지만, 영화의 내용을 전달하는 서술자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긴 힘듭니다. 

 하지만 전편(1982)에서도 주인공인 데커드는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건 빌런이었던 로이 베티였죠. 루트거 하이거의 훨친한 피지컬과 광기어린 연기는 주인공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최후는 영화 최고의 하이라이트이자 영화의 주제, 그 자체였습니다. 로이 베티는 전편(1982)이 가진 한 방이었습니다.

 이번 속편은 그런 한 방이 없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러브는 독기 이외에 의미를 찾기 힘들며, 월레스는 야심으로 가득찬 창조주를 표방하지만 후반부에는 거의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강한 빌런이 없다면 내용에서라도 강한 한 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영화 내내 중심이 되는 레플리칸트의 아이, 그 정체는 좀 뜬금 없었습니다. 케이에게 심어진 기억을 토대로 케이가 그 선택받은 아이였다면 너무나 뻔한 전개였겠죠. 하지만, 기억 설계자인 그녀가 선택받은 아이인 것도 딱히 납득가는 전개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놓친 복선 혹은 암시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순간 카타르시스보다 당황스러움이 더 컸던건 정말 아쉬웠습니다.

 생식능력과 그 기술이 중심이 되는 내용전개도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자식을 만드는 것일까요? 1편이나 이번 속편에서도 레플리칸트들이 인간보다 인간답게 느껴졌던 건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이를 대변하는 것이 케이와 조이의 사랑입니다. 영화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인간들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레플리칸트와 AI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사랑이 중반부 급히 퇴장하고, 데커드와 레이첼의 아이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 전 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식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는 레플리칸트 레지스탕스의 계획은 설득력이 부족했구요. 레플리칸트의 반란 동기가 감정이 아니라 생식능력이 되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차라리 케이와 조이를 끝까지 밀고가는게 영화의 주제와 더 맞지 않나 싶었습니다.

 종(種)의 생존 관점에서 생식능력은 충분히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월레스와 레지스탕스가 마치 대립관계처럼 묘사되는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이 협력해야 이치에 맞죠. 경찰, 레플리칸트, 월레스 모두 생식능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이 설득력있게 그려지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좋은 영화임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자취를 감춘 필름 누아르를 SF에 녹여 부활시켰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 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점은 분명 이 영화에 무언가가 있다는 반증입니다. 하지만, 오리지널 영화의 팬으로서 이 영화를 100% 즐겼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극장을 나오면서 느낀 아쉬움이 재관람을 통해 바뀔 것 같진 않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팬들에겐 추천하고 싶지만, 아니라면 전 분명 망설일 겁니다.


P. S. : 전편 최고의 떡밥이었던 데커드가 레플리칸트이냐, 아니냐에 대해선 현명하게 잘 대처한 것 같습니다. 이번 속편에서도 뚜렷한 정답은 없습니다.

: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을 선보였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80년대를 배경으로 별장에 머물게된 여름손님과 사랑에 빠지는 고등학생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후 연이은 호평으로 내년 아카데미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작품입니다.

올 가을 미국에서 공개 되는데,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시상식 버프를 받고 내년이나 개봉하지 않을까 예상 해봅니다.

소셜 네트워크 이후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아미 해머에게 전환점이 될 것같네요.

원작소설(그해, 여름손님)이 이번달에 막 국내에 출간 되었는데, 굉장히 긴 여운을 남기는 강렬한 로맨스 소설입니다.


Call Me By Your Name 11/24

:

*본문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정말 작년 최악의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좋아하고 싶어도 좋아할 만한 점을 찾기 힘든 영화였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게 혹평을 피했던 인물이 원더우먼이었습니다. 하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원더우먼이 나아보였던 이유는 배트맨과 슈퍼맨이 너무 멍청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지, 원더우먼이 딱히 나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원더우먼은 비중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보여줄게 많지 않았어요.

 배트맨과 슈퍼맨이 만들어놓은 아수라장 다음에 디씨팬들이 받은 것은 다름아닌 수어사이드 스쿼드였습니다. 이쯤되면 대체 뭐하는건가 싶었고, 원더우먼 마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저 역시도 디씨+워너 브라더스 조합은 이제 그냥 믿고 버리는 카드가 되기 직전이었어요. 원더우먼은 예고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개봉일도 전혀 몰랐습니다. 앞의 두 영화가 워낙 깽판을 쳐놓은 탓에 애초에 극장에 갈 마음이 다 사라졌거든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원더우먼은 잘 나왔다는 평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고, 개봉 이후 몇주가 걸려서야 겨우 보러가게 되었습니다.

 결과물은 대만족입니다. 근래 나왔던 슈퍼히어로물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슈퍼히어로 영화여서가 아니라 그냥 영화 자체로도 원더우먼은 흥미롭고, 재밌으며,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영화 관람 전의 회의감을 싹 날려주는 정말 시원한 한 방이었습니다.

 원더우먼은 마블과 디씨가 그렇게 집착해대는 슈퍼히어로 유니버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프닝 씬에서 웨인 엔터프라이즈 트럭이 나오길래 불안했지만, 액자식 구성이기 때문에 오프닝 이후로 슈퍼맨 대 배트맨과 연관지을 만한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니버스 영화에서 그 흔한 끼워팔기 수법도 전혀 쓰지 않구요. 이 영화는 오로지 원더우먼의 기원에만 집중합니다. 

 서사 따윈 날려버리고 속도감있는 전개에만 치중했던 잭 스나이더의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원더우먼은 보기 드물게 정통적인 영웅담 서사를 따라갑니다. 어떻게 보면 미련하다 싶을정도로 기승전결 구조를 충실히 지키는 영화입니다. 2시간 20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동안 영화는 무언가 보여주어야겠다는 조급함에 휘둘리지 않고 천천히 서사를 쌓아갑니다. 관객들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지루한 영화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영화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투자한 덕에 감정이 폭발하는 후반부 하이라이트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굉장합니다. 맨 오브 스틸, 슈퍼맨 대 배트맨만큼 화려하고 엄청난 액션씬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두 영화보다 원더우먼의 액션 시퀀스는 훨씬 더 인상적입니다. 원더우먼이 진정한 영웅으로 각성하기까지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 결실을 맺는 액션 씬들이 더 소중하고, 값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스티브 트레버의 안타까운 결말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목격했기 때문이지, 첫 눈에 반한 사랑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자칫하면 고리타분해 보일 수 있는 사랑과 선(善)이라는 주제의식도 영화의 우직한 태도와 상당히 잘 맞아떨어 집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이 주제의식은 원더우먼이 세상에 눈을 뜨면서 조금씩 흔들리지만, 원더우먼은 자신의 여정을 통해서 그래도 지킬만한 가치들임을 확인합니다. 영화의 끝에서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도, 그녀를 성장시키는 것도 사랑과 선에 대한 그녀의 믿음입니다. 개인적으로 개봉시기를 정말 잘 탔다고 생각하는게, 요즘처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신과 미움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사랑과 선에 대한 가치를 설파하는 슈퍼히어로라니... 굉장한 타이밍 아닙니까? 

 여권신장과 더불어 페미니즘이 헐리웃의 뜨거운 화두에 오른 상황에서 첫 여성감독의 슈퍼히어로물이라 부담이 상당 했을텐데, 정치적 올바름(PC)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점도 매우 마음에 듭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성차별적인 사회상황을 꼬집지만, 페미니즘이 영화 전면에 드러나진 않습니다. 원더우먼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힘을 합치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이지, 남자 아니면 여자, '모 아니면 도'식의 이분법적 사고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원더우먼은 여성관객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모든 관객을 위한 영화입니다.

 고전 영웅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정직하고 우아한 슈퍼히어로물의 다음 여정은 어딜까요? 이 영화처럼 감정과 액션, 메시지까지 모두 잡을 수 있다면 원더우먼 시리즈가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를 뛰어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P. S. : 원더우먼은 영화화가 어려운 코믹스이긴 합니다. 배트맨이나 슈퍼맨 하면 떠오르는 조커, 렉스 루터같은 네임드 빌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죠. 이번 영화에서는 빌런과의 대결보다 원더우먼을 소개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후속편 제작에 있어선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

2017년 최대의 기대작 중 하나 였던 미녀와 야수가 베일을 벗었습니다. 디즈니의 지난 애니메이션 실사화 작품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이 연식때문에 원작의 그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반면, 미녀와 야수는 90년대를 거친 성인들이라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너무나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만큼 이전 작품들에 비해 미녀와 야수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티저 예고편이 역대 예고편 조회수 기록을 갱신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뚜껑을 열어본 미녀와 야수는 마치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원작의 명성을 한없이 드높인 사운드트랙 중 단 한 곡도 빼놓지 않고 충실하게 영화에 옮겨놨습니다. 영화의 모든 씬 연출마저 애니메이션에 극도로 충실하게 재현됐습니다. 'Belle'이나 'Be Our Guest'같은 씬들은 정말 애니메이션이 팝업북으로 뛰쳐나온듯한 싱크로율을 자랑합니다. 원작의 역동적인 연출까지 그대로 재현한 두 장면에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디즈니팬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나면 원작에서 느꼈던 감동보다는 아쉬움이 앞섭니다. 초반의 두근거림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죠. 저는 이게 고민없이 원작을 그대로 카피 해놓은 각본탓인지, 엠마 왓슨의 미숙한 연기력탓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엠마 왓슨은 거의 최악의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이미 해리포터 시리즈를 통해 책벌레 모범생 이미지를 쌓아놓은 엠마 왓슨보다 벨 역에 더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요? 이미지로만 볼 때 엠마 왓슨은 정말 적절한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다른 어떤 배우보다 단점이 많이 보입니다. 뮤지컬씬에 필요한 가창력은 기대이상이었지만, 이외의 일반 대화씬에서 엠마 왓슨의 연기는 정말 실망스럽더군요. 주연 캐릭터를 뒷받침 하던 해리포터 시리즈에서는 주연의 그림자에 묻어갈 수라도 있었겠지만, 미녀와 야수에서 벨은 다름아닌 주인공입니다. 감정연기 하나하나가 너무나 어색해서 혼났습니다. 이건뭐 발성이 문제인지, 표정이 문제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총체적 난국입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베테랑 연기파 배우들이 조연으로 대거 포진한 통에 상대적으로 비교당하는 것은 덤. CG캐릭터들이 난무하는 이 영화에서 유일무이한 인간 캐릭터인 벨이 관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답 없는 연기력과 함께 오히려 길을 헤매고 있으니 한숨이 나올 따름입니다.

 하지만 엠마 왓슨의 연기탓만 하기에 미녀와 야수는 너무 게으른 영화입니다. 그것도 아주 선택적으로 말이죠.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작 따라가기에 너무 급급해서 원작의 단점 마저도 그대로 옮겨 놨습니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이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었던 만큼 이야기는 빠르고 단순하게 진행되었고 개연성을 따지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그걸 실제 사람이 등장하는 실사화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하니 현실과의 괴리가 더 커져버렸습니다.

 반면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준 개성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고풍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이용한 심플한 오프닝에는 신비스러움이 있었고, 고딕호러의 그림자가 드리운 야수의 성에는 범접하기 힘든 으스스함이 베여 있었습니다. 전래동화나 그림동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특유의 분위기를 잘 옮긴 것이죠. 즐겁고 아름다운 뮤지컬씬 사이사이에 도사리고 있던 어둠과 긴장감은 관객들을 더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사영화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모조리 거세되었습니다. 그로테스크한 루미에르와 콕스워즈의 디자인에 일부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익숙한 판타지에서 제자리 걸음입니다. 그림동화의 매력이 사라진 자리는 말끔하게 정돈된 CG들만이 가득 채울뿐입니다. 

 실사영화가 원작과의 차별화를 위해 내놓은 대책들도 안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작에 없었던 벨과 야수의 어린시절, 오리지널 신곡들을 끼워넣긴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별로 도움이 되진 않죠. 관객들이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던 벨과 야수의 어린시절을 추가해놨는데 흥미롭지도 않은 내용들이라 사족같이 느껴집니다. 벨이나 야수의 감정을 보충해줄 신곡들이 그나마 괜찮긴한데, 역시 있으나 마나입니다. 

 결론적으로 2017년판 미녀와 야수는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나 고민 없이 '실사화' 트렌드를 잇기위한 디즈니의 안일한 결과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은 풀HD로 업스케일링된 이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을 찾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기 때문에 관객들마저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26년전 영화에서 오히려 퇴보한 작품의 흥행으로 우쭐했다간 디즈니는 언젠가 크게 큰 코 다칠 겁니다. 박스오피스 성적만으로 자위하면서 공장장처럼 안일한 작품만 쏟아낸다면 꿈과 희망을 주었던 디즈니는 또 소리소문없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P. S. : 리뷰에서는 엠마 왓슨의 단점을 지적하느라 언급하지 못했지만, 괜찮은 배우들도 있습니다. 루크 에반스와 조시 가드 듀오는 이 영화의 유일한 장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게스톤과 르푸도 원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지만, 이들은 원작 캐릭터들의 매력을 100% 소화해낸 케이스입니다. 연기와 노래, 생김새 삼 박자가 모두 갖춰진 덕에 가장 돋보입니다. 만약 벨과 야수, 기타 캐릭터들도 이 둘 만큼만 해줬다면 평가가 확 달라질 겁니다.

:

 CGV 2017 아카데미 기획전으로 핵소 고지를 보고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헐리우드표 전쟁물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편이었는데, 2010년대에 들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트렌드가 슈퍼히어로 무비로 옮겨진 뒤로는 무척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우후죽순 터져나왔던 2차 세계대전이란 소재 자체가 식상해진 면도 있고, 영화로 만들만한 전투를 많이 써먹었으니 소재의 고갈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전쟁물 역시 하나의 트렌드였으니까요. 

 핵소 고지는 멜 깁슨이 10년만에 선보이는 연출작입니다. 앞서말했듯이 닳고 닳은 소재를 어떻게하면 신선하게 풀어낼 수 있을지, 감독도 많이 고민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핵소 고지의 주인공 데스몬드는 일반적인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는 종교적 신념을 근거로 든 양심적 병역거부자입니다. 영화의 절반은 그의 성장기를 따라 왜 그가 폭력을 거부하는지,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입대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불우한 어린시절과 전쟁물에 빠질 수 없는 알콩달콩한 로맨스, 법정 드라마까지 평범하지만 흥미로운 드라마의 연속이죠. 입대전 데스몬드의 인생을 짧게 축약해서 그리고 있긴하지만, 그의 신념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사건 위주로 서술된 영화 초중반은 상당히 압축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캐릭터 구축에 상당히 공을 들인덕에 관객들의 엉덩이는 조금 아플지언정, 후반부 하이라이트의 감동은 배가 됩니다. 관객들은 불필요해보이지만 중요한 이 준비과정을 지켜보며 이 캐릭터가 왜, 어떻게 자신의 신념과 대립되는 폭력의 한가운데 놓여지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액션이 펼쳐지는 중후반부는 여타 전쟁물과 다를바 없이 전쟁의 잔혹함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이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폭력 묘사에 일가견을 드러낸 멜 깁슨답게 조금의 미화도 없이 그 잔혹함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여기서 그쳤다면 핵소 고지는 과거 전쟁물의 재탕이라는 소리밖에 못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특별한 주인공, 데스몬드가 있기에 핵소 고지의 전쟁씬은 여느 영화들보다 훨씬 무섭고 긴장됩니다. 스릴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총도 없이 참전한 우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폭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살아남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초중반 드라마를 본 관객이라면 이상해보이지만 듬직한 우리의 주인공을 응원할 수밖에 없구요. 

 핵소 고지는 특별한 영화입니다. 인간의 폭력성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전쟁에 폭력을 거부하는 주인공이라니.. 하지만 그 아이러니는 여지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특별한 감동과 교훈을 주죠. 신념대로 살아간다는 것, 수많은 손가락질과 비판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데스몬드 도스는 아름다운 모순입니다. 핵소 고지의 감동은 승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에서 오는 것이지요. 데스몬드를 고깝게 여기던 부대원들도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야 데스몬드가 총 없이도 나와 함께 싸워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잃지않는 데스몬드의 태도도 멋있었지만, 나와 조금은 다른 '전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부대원들의 모습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핵소 고지가 가진 깊이와 색다른 주제는 이 영화를 평범한 전쟁영화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합니다. 신념과 타인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