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퍼펙트 케어는 법적후견인 제도의 빈틈을 파고들어 무력한 노인들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소시오패스 주인공, 말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고로 주인공이 빌런이란 말씀. 어설프게 빌런에게 동정심을 살만한 슬픈 과거사나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식의 사탕발림이 없다는 점은 칭찬할 만합니다.

 하지만, 초반부터 말라에게 털리는 죄 없고, 운도 없는 노인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관객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라 본인과 그 주변인물들(애인과 의사, 요양원 관리자 등)은 하나같이 본인들의 행동에 일말의 죄의식도 없기 때문에 말라의 스토리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적대자나 희생자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 정말 독특한 영화입니다. 관객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할만한 주조연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일반적인 안티 히어로 영화라면 적어도 주인공보다 더 사악한 적대자 포지션의 캐릭터를 제시함으로써 주인공 캐릭터에게 어느정도의 감정이입을 허락하는게 보통입니다. 빌런 중심의 영화라면 주인공이 왜 빌런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제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희생자 캐릭터에 어느정도 스포트라이트를 배분해서 주인공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복수하도록 함으로써 장르적 쾌감을 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퍼펙트 케어'는 이 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뒤지길 바라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물론 관객이 주인공보다 악역을 응원하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는 주인공이 하는 짓이 너무 멍청하고 비호감이거나 악역이 주인공보다 훨씬 멋질 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영화의 완성도가 엉망이지 않는이상 이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퍼펙트 케어'는 이 경우에 해당한다 보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후반부 완성도가 급격히 떨어지긴 하지만, 영화가 너무 엉망이여서라기 보다는 그냥 주인공이 너무 사악해서 죽길 바라는 감정이 더 큽니다. 안티 히어로나 빌런이 중심이 되는 영화는 많았지만, 이 정도로 관객이 주인공 캐릭터에 비집고 들어갈만한 틈을 조금도 주지 않는 영화는 정말 드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나마, 말라가 잘못건드린 피터슨 여사가 그나마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일텐데 영화는 피터슨 여사를 플롯 장치로 사용하는데 그칩니다. 그렇다면 적대자 포시젼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아들, 러시아 마피아 캐릭터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해질 수 밖에 없는데 이 캐릭터는 그냥 관객의 기대치에 한참 못미치는, 그냥 덜떨어진 인물에 불과합니다. 명색이 마피아 보스인데 무력한 여자 두 명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걸보면 위협적이란 느낌은 단 1도 들지 않습니다. 러시아 마피아가 말라를 뛰어넘는 악역이거나, 기대이상의 시련을 안겨줌으로써 말라의 여정에 어느정도 굴곡을 주었어야 했는데 둘 중 어떤 기능도 하지 못하죠. 결국 영화에는 말라의 사악함에 대적할만한 적대자도 시련도 없습니다. 말라는 그냥 무적입니다.

 주인공을 막아서는 어떤 장애물도 존재하질 않으니 영화의 후반부는 그냥 날로먹기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런 어려움이나 문제 없이 주인공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니 어떤 성취감도 없습니다. 관객들은 그저 방관자로서 지켜보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도 감독이 양심은 있었는지 말라는 권선징악적 최후를 맞긴합니다만, 이미 말라가 러시아 마피아와 손을 잡고 본인의 회사를 대기업으로 키운 상태기 때문에 그녀가 죽더라도 그녀의 유산은 누군가에 의해 이어질 확률이 100%입니다. 되려 영화 초반보다 상황은 나빠진거나 다름없습니다. 법적후견인 사기극이 아예 조직범죄가 되어버린 꼴이니까요. 억울하게 이 회사에 걸려든 희생자들이 풀려날 가능성은 더 희박해졌을 뿐입니다. 이걸 정의구현으로 보긴 힘들다 봅니다. 

 영화 초중반에 보여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날림전개와 플롯아머로 순식간에 날려버리기 때문에 곱씹어 볼 수록 개선의 여지가 너무나 뚜렷해서 더더욱 안타까운 영화입니다. 장르영화로서 살아남고자 했다면 앞서 언급했듯 주인공에 합당한 적대자, 시련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아예 희생자 캐릭터를 부각시켜 정의구현과 함께 장르적 쾌감을 추구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회 풍자극이 되고자 했다면 미국의 사법 시스템의 오류를 더 적나라게 파고들었어야죠. '퍼펙트 케어'는 이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이도저도 아닌게 됐습니다.

 주인공을 한없이 증오하게 만들다니 분명 신선한 시도였고, 절반의 성공은 인정하는 바입니다. 2시간 동안 피를 끓게 만들어준 로즈먼드 파이크의 열연도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좋은 소재와 캐릭터를 갖고도 이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한건 분명 실책입니다.

:

나흘 전 워너 브라더스는 2021년 개봉예정작을 모두 극장 개봉과 동시에 자사 스트리밍 서비스, HBO Max에 동시 공개한다고 발표하며 헐리웃 영화계에 큰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워너 브라더스의 선택에 대한 갑론을박이 진행중인 가운데 워너의 폭탄선언이 가져온 후폭풍을 다룬 기사가 있어 옮겨와 봅니다. 해당 기사는 헐리웃 리포트지의 12월 7일자 기사, "크리스토퍼 놀란, 워너 브라더스의 플랜을 맹비난하며, HBO Max를 '최악의 스트리밍 서비스'라고 헐뜯다(Christopher Nolan Rips HBO Max as "Worst Streaming Service," Denounces Warner Bros.' Plan)"입니다. 오역과 의역이 어느정도 있을 수 있으니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워너 브라더스의 플랜을 맹비난하며, HBO Max를 '최악의 스트리밍 서비스'라고 헐뜯다 by Kim Masters


많은 영화 종사자들-제작자, 감독, 배우와 그들의 대리인들[각주:1]-에게 2020년 12월 3일은 불명예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이다.


"업계 최고의 영화 제작자와 스타 배우들이 현시대 가장 위대한 스튜디오와 일한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일어나보니 자신들이 최악의 스트리밍 서비스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는걸 깨달은 꼴이죠". '배트맨 비긴즈'로 워너 브라더스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영화 감독 크리스포터 놀란이 헐리웃 리포터지에 밝힌 입장이다.


놀란 감독은 "워너 브라더스는 감독의 작품을 극장과 가정, 모두에게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워너 브라더스는 그 시스템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워너 브라더스는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잃고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그들의 결정은 경제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가볍게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도 (시스템) 붕괴와 기능 장애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아요"라 덧붙이기도 했다.


악몽같았던 그날 아침, 워너미디어 스튜디오 앤 네트워크 그룹의 회장겸 CEO인 앤 사노프와 워너 브라더스 필름 스튜디오 회장, 토비 에머리히는 메이저 에이전시 수장들에게 전화로 워너가 극장 상영 기간 협약[각주:2]을 부수고, 2021년 개봉예정작 17작품을 모두 관객 수용이 가능한 극장들에 개봉시키는 동시에 자사의 비틀대는 스트리밍 서비스, HBO Max에도 공개하겠다는 폭탄선언을 날렸다.


업계 종사자들에겐 놀랍게도, 정보원에 따르면 해당 아이디어는 워너 브라더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캐롤라인 블랙우드로 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캐롤라인은 상대적으로 약한 2021년 자사 개봉예정작 라인업을 보며 잠재적인 박스 오피스에서의 실패를 피하면서 동시에 스트리밍에 집착하는 상관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 것.


(워너 브라더스의 깜작 발표에) 헐리웃은 바로 격노했고, 전투를 위한 준비태세에 돌입했다. 업계 한 탑 탤런트 에이전시는 "워너가 큰 실수를 한거예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회사에 화를 내고있는건 본 적이 없습니다."라 말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해당 에이전시는 현재 놀라고, 분노한 클라이언트들의 전화통화에 응대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편, 칼을 갈며 전투에 대비 중인건 변호사들이다. 워너 브라더스는 (논의없이) 자체적으로 해당 영화들을 자사 스트리밍 서비스에 넘겼거나, 어쩌면 부정하게 행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부 탤런트 대리인들은 워너의 결정이 잔여금 상황에 영향을 미칠경우 이해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해당 영화들을 작업했던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칠거라며, 조합도 이 일에 합류하길 바라는 모양새다. (미국 작가 조합[각주:3]은 코멘트를 거절했다.)


워너의 결정은 큰, 어쩌면 실존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 한 번 뿐일 지도 모르는, 코로나 사태를 빌미로한 결정으로부터 극장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번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기 힘들고, 누구도 워너의 이번 결정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다고 믿지 않는다. 집에 있으면 대작들이 스스로 찾아온다고 소비자들을 학습시킬때 극장주들이 입을 피해는? 그리고 워너는 중요 제작자, 감독, 조합, 배우들로부터 받을 심각한 반발에 직면할까? 한 에이전트는 "워너는 철저히 탤런트와 영화제작자들에게 친화적인 스튜디오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첫 번째로 일하고 싶은 스튜디오가 아니게 됐어요. 두 번째, 세 번째로도 아니예요."라 말했다.


헐리웃의 많은 사람들은 워너미디어가 이렇게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이유가 스트리밍에 미친 월 스트리트 비위를 맞추는 동시에 860만명이란 저조한 구독자수로 시작한 HBO Max의 미진한 런칭을 무마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유명 에이전트는 워너미디어의 최고간부들과 모회사(AT&T CEO 존 스탠키와 워너미디어 CEO 제이슨 킬라, 앞서 언급했던 앤 사노프)가 영화산업 뿐만 아니라 스튜디오와 탤런트 간의 관계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킬라가 극장측에 립서비스를 하고 있는 가운데 업계 베테랑들은 워너가 그간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포맷과 플랫폼으로 자사 콘텐츠를 판매함으로써 얻었던 막대한 이익을 희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너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부터 이미 에이전트들 사이에선 1년 넘게 워너미디어 스튜디오 앤 네트워크 CEO직을 맡았음에도 영화계쪽 핵심인력들과 친분을 맺지 못하고, 그렇다할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있었던 앤 사노프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인들의 분노가 (워너 브라더스 필름 스튜디오 회장, 토비) 에머리히에게 향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워너의 주요 탤런트를 대리하는 한 에이전트는 "토비의 열정은 상사에게 잘 보이는 것 뿐이다"라 덧붙였다.


해당 발표가 있었던 주말까지 에머리히는 2021년에 예정된 프로젝트들에 연관된 영화제작자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예고없이 그들 영화가 스트리밍으로 갈 일은 없을거라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워너의 주요자산과 연관된 한 프로듀서는 "누구라도 토비가 해당 상황에 대해 통제권이 있다고 믿었을거예요."라 말했고, 한 에이전트는 "토비는 아마 최악의 (해당 발표가 있었던) 주말을 보냈을 겁니다, 물론 제가 거기에 대해 안타깝게 느끼는건 아니고요."라 말했다.

정보원에 따르면 에머리히는 '인 더 하이츠[각주:4]'의 감독, 존 추 감독을 달래기 위해 '인 더 하이츠'는 여전히 전세계 극장 개봉될 거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워너 브라더스가 (극장/HBO Max 동시공개 예정인) 해당영화들이 HBO Max에 공개되도 불법 유포 및 다운로드가 곧장 일어나지 않을거란 순진한 생각에 빠져있다고 지적한다. 업계 중진은 스트리밍 동시 공개가 되는 순간 즉각적으로 완벽한 버전의 영화가 모든곳에 유포될거라고 지적했다.


워너미디어가 해당 영화 관계자들에게 큰 수표를 써줄 준비가 되면 현재의 분노는 사그라들 것이다. 한 대리인은 "워너에겐 지금이 탤런트들과의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최고로 중요한 순간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이전트들은 현재까지 그들에게 안내된 바로는 워너쪽이 그들에게도 소위 "원더우먼 머니-'원더우먼 1984'가 HBO Max로 옮겨가면서 해당 영화의 이해관계자들이 받은 관대한 액수의 돈-"라 불리는 만큼의 금액을 줄 것 같진 않다고 밝혔다. 


시리즈의 3편 제작을 희망하며 워너미디어는 갤 가돗과 핵심 인력들에게 몇천만 달러[각주:5]를 퍼부었다고 한다. 이로인해 (HBO Max 동시공개 결정에 따라 다른 영화 관계자들에게 지급해야할 금액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게 되었다. 정보원들에 따르면 플랫폼에 구애받지 않는 축에 속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제임스 건 감독마저 워너 브라더스가 폭탄선언 이후 자신과 동료들에게 제시한 실망스런 보상방안을 반기지 않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래도 최소한, 워너미디어는 17개 영화와 관련된 다수의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보상책을 놓고 메이저 에이전시들과 고된 협상문을 열어놓긴 했다. 워너쪽 회계사들은 2021년 개봉예정작을 전원 HBO Max행 시킬 때 드는 비용에 이로인해 널리 예상되는 법적 문제에 들어갈 비용까지 생각했는지 의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HBO Max 동시공개작, 17개 영화들의) 해당 이해 관계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스트리밍 동시 공개를 전제로 애플이나 넷플릭스 등 타스트리밍 업체에 판매할 경우 받을 수 있는 금액을 알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상태에서 워너미디어가 해당 영화들을 자사 스트리밍 서비스에 넘겼기 때문에 워너미디어가 스스로를 노출시킨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다. 워너 미디어의 사적 금융거래에 대한 혐의가 따라올 것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많은 이들이 레전더리[각주:6]가 첫 번째로 법적 문제를 제기할 스튜디오라 생각하고 있다. 워너는 넷플릭스가 -올 3월에서 11월, 2021년 5월로 세 차례 개봉일을 연기한-'고질라 vs. 콩'의 판권을 두고 2억 2,500만 달러보다 높은 액수를 제시하는 제안을 이미 거절한 바 있다. 레전더리가 영화 예산의 75%를 투자했지만, 해당 영화의 판매를 제한할 수 있는 파워를 가진건 워너쪽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넷플릭스 제안을 워너가 거절한 뒤) 레전더리는 워너쪽에 그러면 HBO Max에 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계약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봤으나 워너쪽 간부들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고, 12월 어느날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자신들과 협상도 없이 워너가 '고질라 vs. 콩'을 워너 자사 스트리밍 서비스에 동시공개할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전더리의 더 비싼 프로젝트인 '듄'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워너 영화에 투자한, 빌리지 로드쇼나 브론같은 다른 회사들도 분개하고 있으며, 워너와 한 판 붙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탤런트들[각주:7]이 있다. '듄'의 감독 드니 빌뇌브는 자신의 작품에 있어 전통적인 극장 배급이 필수적이라고 강하게 믿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차기작, '인 더 하이츠'를 두고 린마누엘 미란다와 함께 업계 여러 회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공동체적인 극장경험을 중시해서 넷플릭스의 거대한 제안도 뿌리치고 워너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만들었던 존 추 감독은 업계 동료에게 워너의 결정을 통보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정보원들에 따르면 워너미디어 내부관계자들은 디즈니가 자신들의 선례를 따라 자사 영화들을 디즈니+에 동시 공개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작년에만 70억달러 수익을 냈던 디즈니가 워너의 자취를 따라갈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대신, 디즈니는 '크루엘라'와 몇몇 자사 개봉예정작 중 일부를, '해밀턴'과 '아르테미스 파울'에 했던것처럼, 스트리밍으로 독점공개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에이전트들은 디즈니일 경우 워너가 했던 것과는 극명히 대조되게 스트리밍행을 처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해당 에이전트는 디즈니는 일방적으로 일처리를 하진 않는다며, 디즈니는 스트리밍행을 시키더라도 해당 작품의 이해관계자들에게 먼저 연락해 수월한 일처리를 도왔다고 덧붙였다.


디즈니+가 자사의 유명 IP에 기반을 둔 '만달로리안'의 히트로 부터 많은 이익을 얻으며 HBO Max의 구독자수를 초라해 보이게 만들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워너의 경쟁사에 몸담고 있는 한 임원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가 런칭된 적은 없었다.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는 극장에서, 오프닝주와 함께 시작한다"고 말한다. 현재까지도 그런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머천다이즈 판매와 테마파크 어트랙션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워너는 테마파크 사업을 하고 있진 않지만, 현재 (워너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HBO Max로 직행 시켰을 그런 영화들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어왔다. 작년 워너의 메가히트작, '조커'를 생각해보자. 필름-스튜디오의 수장이었던 에머리히는 이 프로젝트에 호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조커 제작을 지지했던 사람은, 현재는 워너에서 밀려난 월드와이드 마케팅 사장이었던 블레어 리치였다. 에머리히는 '조커'의 예산을 낮게 책정함으로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제작의지를 꺾으려 했으나, 제작자들이 집요하게 설득 끝에 영화 예산의 절반을 대기로 결정한다. '조커'는 사회적인 현상이 되어 전세계적으로 1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리는 동시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남우주연상을 배출하는데 영예를 누렸다. '조커'가 만약 HBO Max에서 공개되었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반대되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AT&T 회장 존 스탠키나 제이슨 킬라가 영화 유산을 지키는 일에 관심이 없을거라 생각한다. 킬라는 워너 브라더스의 결정이 팬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CNBC와의 인터뷰에선 "우리 하루의 시작과 끝이 고객에 집중한다면 우린 업계 리더가 될 것이다"라며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킬라의 발언은 넷플릭스의 신작, '맹크' 에서 반백의 베테랑, 허먼 맹키위츠가 벼락스타, 오슨 엘스에게 건네는 주의 섞인 대사를 떠오르게한다; "이 친구야, 자네는 아웃사이더야. 나야 화를 사도 달라질 건 없지만, 자네 같은 자칭 팔방미인은 뒤에서 이를 가는 사람이 많다고."


이것은 또한 할리웃의 오래된 격언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콘텐츠가 왕이다. 콘텐츠는 예술가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예술가들이 언제나 돈에 동기부여를 받는 것은 아니다. 워너와 함께 일하는 핵심 탤런트들을 대리하는 한 에이전트는 말하길, "워너는 가장 인재 친화적인 스튜디오로서 몇십년간 축적된 유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워너가 이제 과거의 유산과 작별하고, '우린 인재들 따위에 관심없다'고 환한 글씨로 써진 간판에 불을 켜놓은 꼴입니다."

  1. 매니저와 에이전시 등 [본문으로]
  2. theatrical window. DVD/블루레이, PVOD 등 영화가 2차 시장으로 넘어가기 전 일정기간 동안 극장상영을 보장한다는 배급사와 극장사이의 협약을 뜻합니다. 한글로 딱히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극장 상영 기간 협약'이라 부르겠습니다. [본문으로]
  3. Writers Guild of America. [본문으로]
  4. 린 마누엘 미란다가 작사/작곡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하는 작품. [본문으로]
  5. 루머로는 갤 가돗과 페티 젠킨스 감독이 각각 천만 달러씩 보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6. '고질라 vs. 콩', '듄' 제작사 [본문으로]
  7. the talent란 말 자체가 미국에선 재능을 가진 사람들-감독, 배우 등-을 모두 총칭합니다. 그냥 '업계의 인재들'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인재'라 번역하기엔 좀 그래서 그냥 탤런트로 그대로 갔습니다. [본문으로]
:

[Review] 맹크(Mank, 2020)

movies 2020. 11. 30. 23:05 |

국내개봉 후 먼저 본 일반관객들의 지루하다는 평들이 좀 보이길래 넷플릭스에 뜰 때까지 기다릴까 고민도 많이 했네요, 실화 소재라는 점에서 '조디악'처럼 덤덤하게 일대기를 보여주는 형식이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핀처 영화 중 유일하게 재미없게 본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핀처의 신작인데 이왕이면 극장에서 보자란 생각으로 내리기전에 얼른 보고 왔습니다.

 하지만 보고난 영화는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핀처 커리어에서 톱3에 꼽아도 아깝지 않은 영화예요. 일단 맹크라는 주인공 자체가 괴짜 달변가라 지켜보기 참 재밌는 인물이예요. 여기에 주변의 마리온 데이비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루이스 B. 메이어, 오슨 웰스까지 개성 넘치는 주변인물들도 더해지면서 서로간에 주고받는 티키타카가 개인적으로 취향저격이었습니다. 장르팬으로서 고전 스크루볼 코미디를 보는 듯한 느낌이어서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화면이나 사운드, 편집 등이 고전영화(그 중에서도 '시민 케인')의 형식만 따랐을 뿐 핀처의 전작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빠른 페이스로 진행되는 점도 좋았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나 '나를 찾아줘' 등과 마찬가지로 핀처 영화 특유의 '리듬'도 살아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사전지식을 전제로 깐 감상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전 이런 류의 영화를 선호하진 않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전지식의 유무와 무관하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더 좋은 영화라 생각합니다.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했어도 배경지식과 무관하게 재밌게 만든 영화가 많기도 하구요. 각설하고 '맹크'로 돌아가자면, '맹크'는 오슨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을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100% 즐길 수 없는 영화입니다. '시민 케인'의 내용이 영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건 아니지만, 영화의 굵직굵직한 사건 하나하나가 주인공 맹크의 '시민 케인' 각본 집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자체가 이 사건이 '시민 케인'의 이 내용에 영감을 주었구나식으로 연결짓는데서 비롯되는 점도 있구요. 두 영화를 오가며 마지막 완성된 퍼즐을 보고 감탄할 수 있을 때 진가가 드러나는 영화기도 합니다. 감독 본인도 그걸 의도한 것 같구요. 주인공이 겪는 창작적 사투의 결과물로서 '시민 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알고 보느냐 모르고 보느냐는 천지차이입니다.

 문제는 '시민 케인'이 고전영화의 걸작으로 칭송받긴하나 현시점에서 볼 때는 큰 재미를 주는 작품은 아니란 점입니다. 저도 '맹크' 보기전에 억지로 꾸역꾸역 감상했는데 두 번이나 조는 바람에 무려 세 번째 도전에서야 겨우 다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봐도 세련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영화지만, 재미면에선 충분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기에 진입장벽이 꽤 높다고 생각됩니다. '시민 케인'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은 고로 '맹크'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이나 다름 없기에, '맹크'는 이전 핀처영화들과 달리 상당히 어려운 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장벽만 뛰어넘는다면 '맹크'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이전 핀처 영화들을 채웠던 차갑고 냉소적인 감성에서 벗어나 따뜻한 시선으로 인물들을 바라본다는 점도 신선합니다. 전작들에서 인물들이 핀처 특유의 완벽주의 무대 위에서 장기말처럼 움직였던 것과 달리 '맹크'에서 헐리웃 영화 산업의 무심한 일원이었던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서사는 분명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후로 가장 인간미 넘치는 핀처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누구에게나 추천하긴 힘든 영화지만, 고전영화팬들이라면 필히 관람해야만 하는 영화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신 분들껜 '시민 케인'과 함께 한 번쯤 (세트로) 도전해볼만한 영화입니다. 극장에서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구요.



P. S.: '시민 케인' 외에도 찰스 댄스가 연기하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란 인물에 대해 알고가는 것도 감상에 도움이 됩니다. 그가 개입했던 프랭크 메리엄과 업튼 싱클레어의 주지사 선거에 관한 내용도 함께 알고 있으면 더욱 좋구요. 관람전에 간단히 검색해보고 가세요.

:

 영화는 심한 의처증을 보이는 남편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세실리아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언니의 도움으로 세실리아는 가까스로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는데 성공하고, 얼마되지 않아 남편의 부고를 전해 듣게 됩니다. 부고를 접한 세실리아를 이내 덮치는 것은 안도 대신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다는 불안감입니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예상은 적중합니다.

 '인비저블 맨'은 보이지 않는다는 투명인간의 특징을 영화 내외적으로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소재 자체가 그저 빈화면을 잠시 비춰주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공포영화로서는 더할 나위없이 효율적인 장치입니다.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관객들을 주인공과 함께 항상 주위를 경계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서서히 고립되어가는 주인공의 처지와 겹치게되면 그 효과는 배가되구요.

 투명인간의 특징이 주제면에서 기여하는 부분도 무척 큽니다. 공포영화는 단순한 장르영화로 치부되기 십상인데 투명인간이란 소재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소재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해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정폭력에 대한 은유입니다. 투명인간의 보이지 않는 특징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지만 누구도 쉽게 볼 수 없고, 보여주기도 힘든 가정폭력의 특징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라진 남편으로부터 문자 그대로 쫓기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가해자가 있든 없든 그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찾아볼 수 있죠. 

 가해자 남편의 스토커적인 면모는 감시사회, 관음증에 대한 혐오를 연상하기도 합니다. CCTV와 인터넷, 스마트폰이 필수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은 단순히 남여관계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가정폭력, 데이트폭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공포심을 자극합니다.

 최근 헐리웃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편승한 얕은 접근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신다면 생각이 달라질거라 확신합니다. 이 영화는 관객을 교화하려 들거나 무거운 주제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소모하지도 않습니다. 가정폭력이란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지만 이를 다루는 영화의 태도는 결코 가볍지 않죠. 그런 태도가 이 영화에 무게감을 부여하지만, 한편으론 여기서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영화 러닝타임 내내 약자입장인 주인공에게 폭력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보니 관객들이 불편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인 주인공이 속수무책으로 주구장창 당하고만 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관객입장에선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즐겨도 되는건가?'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영화 속 공포나 긴장감의 조성이 관객들이 오락영화에서 기대하는 유희 목적의 그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보니 오히려 보고나면 기분나쁜 불편한 영화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거죠. 물론 영화의 구조 자체는 기존 헐리웃 공포영화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습니다. 예상하듯 결국 주인공은 승리하고,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니까요. 하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인 톤 덕분인지 폭력이 끝났을 뿐 누구도 승리하진 못했다는 인상이 더 강합니다.

 결론적으로 '인비저블 맨'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기존 투명인간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성공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들었던 만큼이나 누구에게 선뜻 추천하긴 힘든 영화기도 하며 개인적으로는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는 불편한 명작입니다. 장르팬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봐도 좋을 법한 영화지만, 아니라면 개인의 선택에 맡기고 싶습니다. 가정폭력 가해자들에게 교화용으로 강제관람하게 만든다면 효과적인 처벌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

 전 버즈 오브 프레이를 재밌게 봤습니다. 내용 자체가 너무 단순해서 평범한 전개였다면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이었을텐데 초중반에 펄프픽션 스타일로 시간대를 살짝 뒤섞어놓은 것이 신선했습니다. 킬링타임용일지언정 자신만의 톡톡 튀는 개성이 빛나는 영화였다는 점에서 칭찬해주고 싶었습니다. 다만, 액션씬에 있어선 두 가지 이유로 좀 복잡한 심경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불만은 대다수 스턴트가 평범한 남성액션처럼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액션 쪽은 존 윅의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이 참여했다고 하던데 스턴트 안무나 동선 자체는 정말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성액션인 만큼 스피드나 무기력에 중점을 둔 액션을 기대했는데 어찌 스턴트들이 죄다 근력이나 힘을 과시하는 쪽이라 어라 싶은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네요. 신체적 한계에 있어서 남녀의 차이가 뚜렷한게 현실인 만큼 여성액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남성액션물과 차이가 거의 없어보여서 좀 아쉬웠습니다. 

 '힘'을 보여주는 액션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저의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들에게 있어 그들의 '힘'에 대한 특별한 설정이 전혀 부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평범한 악당들도 아니고 보디빌더급 근육 빵빵한 남자들이 여자들 발차기 한방에 픽 꼬꾸라진다는 스턴트 자체가 설득력이 안 느껴졌습니다. 헌트리스는 킬러들한테 길러져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는 묘사도 있었고, 석궁을 중심으로 액션이 펼쳐져서 그럴듯하기라도 했어요. 반면, 여형사나 블랙 카나리의 스턴트는 펀치나 발차기 액션을 중심으로 힘을 강조한 경향이 특히 더 강한데, 두 캐릭터 모두 원더우먼처럼 힘에 있어서 슈퍼파워를 지닌 것도 아닌데 스턴트를 이런 식으로 구성했다는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습니다. 할리퀸은 야구방망이나 망치를 많이 쓰긴 했지만, 묘하게 엄청난 발차기력의 소유자로 그려져서 좀 의문스러웠습니다.

 두 번째 불만은 앙상블 액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합동전투씬이 매우 빈약했다는 점입니다. 중반부 할리퀸의 경찰서 난입씬은 앞서 말했던 첫 번째 불만을 차치하더라도 할리퀸의 경쾌한 에너지가 가득 느껴져서 단점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만족스런 액션씬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되야했던 놀이동산에서의 합동전투씬은 캐릭터들간의 케미스트리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액션면에서도 서로의 합을 거의 볼 수 없는 중구난방 스턴트가 펼쳐져서 초중반부터 쌓아온 흥분감에 찬 물을 끼얹었습니다. 영화 제목도 '버즈 오브 프레이'고 여성 캐릭터들의 연대를 강조한 영화에서 여성캐릭터들이 모두 모여 걸파워를 보여줘야할때 가장 재미도 없고 지루한 연출이 이어졌다는게 좀 아이러니했습니다. 정작 놀이공원에서 탈출한 뒤 로먼을 추격할 때 펼쳐지는 롤러 블레이드 추격씬은 또 잘 만들어져서 더더욱 이상했구요. 수많은 액션씬 중 유독 그 장면만 재미가 반감되서 영화에 대한 전체적 인상을 구겼다는 느낌입니다. 

 배우들의 스턴트 연기에는 전혀 불만이 없습니다. 스턴트 감독이 짜준대로 열심히 훈련해서 최선을 다했다는게 영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났으니까요. 다만, 후속편이 나온다면 남성 액션영화를 그대로 복붙해서 성별만 반전시키기 보다는 여성 액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개성을 좀 더 살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장단점이 뚜렷하지만 나쁘지 않은 첫 시작입니다. (이 영화가 흥행한다면) 부디 후속편에선 차차 개선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

 시사회를 통해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프론트 러너로 활약중인 '1917'을 감상하고 왔습니다. '1917'은 적진을 가로질러 1,600명 아군의 목숨이 달린 편지를 전달하는데 투입된 두 병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동안 FPS게임을 하는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아니지만, 카메라가 러닝타임 내내 롱테이크로 주인공을 잡고있기 때문에 제한된 관객의 시야가 관객들로 하여금 게임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유사체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간단명료한 스토리까지 겹쳐져 장군의 편지를 전달한다는 임무가 주인공 뿐만 아니라 주인공에게 동화된 관객들의 목표가 된다는 점 역시 엔딩을 목표로 게임을 하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게임적인 체험(또는 몰입)이 주인공과 동화된 관객들로 하여금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게 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는 측면에서 '1917'이 가진 게임과의 유사성은 단순한 기믹 이상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7'에서의 '체험'은 액션에만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쉬어가는 구간처럼 보이는 작은 장면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널부러진 과일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휘날리는 꽃잎이 손에 닿는 그런 소소한 장면 역시 주인공과 함께 느낌으로써 영화는 관객들에게 전장에서 피어나는 일상에 대한 향수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그러한 작은 장면들이 모여서 액션씬들에 무게감을 더하고, 더 나아가 영화의 주제적 측면에도 기여합니다. '1917'은 내내 휘몰아치는 태풍으로 관객들을 몰아세우고 압도하기 보다는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이따금씩 비를 피하게 해주면서 관객이 맑은 날씨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에 가깝습니다.

 물론 제작진은 '체험'에 방점을 두고 영화를 기획한 것이겠지만, 의도든 아니든 요즘 관객들에게 생소한 1차 세계대전이란 소재나 이제는 슈퍼히어로물로 대체되어버린 전쟁장르의 현상태를 고려할 때 '1917'이 제공하는 게임적인 체험은 게임이나 VR에 익숙한 신세대 관객들과 영화간의 거리감을 줄여주는 '무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클래식 전쟁물이 가진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 시대에 걸맞는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1917'은 구세대와 신세대를 모두 아우르는 2010년대의 대표 전쟁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의 뛰어난 완성도와 별개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역대급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현시점에 국내에 공개된다는 점이 무척 아쉬울 따름입니다. 

: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모리스'가 무려 32년만에 국내에서 정식개봉합니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에서 으레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상당히 인상깊었던 기억이 납니다. 

 E. M. 포스터의 원작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상이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스'에서 동성애는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바꿀 수 없는 본능, 주인공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으로써 그려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시대를 한참 앞서나간 작품이죠. 뒤늦게나마 국내 관객들이 이 작품을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어서 기쁘네요. 

 미국과 해외등지에서는 작년에 4K 복원판이 재개봉 했었는데 이를 기념해 주연배우, 제임스 윌비가 헤이유가이즈(클릭)와 인터뷰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인터뷰를 가져와봤습니다. 오역이나 의역이 있을 수 있으니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헤이유가이즈(이하 HU): 저희에게 이 멋진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개봉한지) 30년이 지나서도 이 영화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는게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제임스 윌비(이하 JW): 네, 하지만 제 커리어가 '모리스'와 함께 시작됐기 때문에 이 영화는 늘 저와 함께 해왔어요. 이 영화 이후로도 머천트-아이보리[각주:1]와 두 번 더 작품을 하면서 둘과는 친한 친구가 되었죠. 언제나 자주보는 사이였구요. 유감스럽게도 이스마일은 이제 떠났고,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비극이었습니다. 가족 중 한 명을 잃은 것만 같았으니까요. 여전히 이스마일이 그립고, 그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해요. 몇 달전에 BFI(영국 영화 협회)에서 '모리스' 상영회가 있었는데, 휴 (그랜트)와 제가 참석해서 무대인사를 했었어요. 그 때 휴에게 "남아서 영화 보고갈래?" 물어봤었는데,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휴가 그러자고 하더군요. 저도 20년간 '모리스'를 보지 않았는데 그 때 휴와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봤어요.


HU: 영화에 캐스팅되기 전에 E. M. 포스터의 원작을 알고 계셨나요?


JW: 아뇨, 그전엔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런말 하긴 좀 부끄럽지만 '모리스'를 하기 전엔 E. M. 포스터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본적이 없어요. 물론 캐스팅되고 나선 모두 읽었죠.


HU: 윌비씨가 캐스팅 되기 전 (휴) 그랜트씨는 이미 영화에 캐스팅된 상태였다는걸 알고계셨나요? 이미 서로 아는 사이여서 더 편하셨는지?


JW: 전 원래 주인공 역할이 아니었어요, 모리스역으로 처음 캐스팅된건 줄리언 샌즈[각주:2]였죠. 이유는 모르지만, 촬영 직전에 줄리언이 하차했고, 제가 다시 주인공 후보가 되었어요. 전 원래 다른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고, 짐 (아이보리)은 캐스팅 감독에게 "쟨 줄리언이랑 너무 닮아서 영화에 넣으면 안돼"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요. 줄리언이 하차하고 제가 다시 주인공 후보가 돼서 휴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나요.[각주:3] 휴랑 함께 대본을 읽고 오디션 할 걸 알고있었거든요, 휴는 이미 (클라이브 역으로) 캐스팅된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오디션 하루 전에 휴랑 대본을 쭉 훑어봤어요. 오디션 전에 배우랑 함께 합을 맞춰볼 수 있었다는게 제겐 큰 이득이었고,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죠.


HU: 게이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한 우려는 있으셨나요? 혹은 당시 주류관객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걱정하셨는지 궁금해요.


JW: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하던데,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런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우린 배우고 주어진 역할이 무엇이든 연기를 할 뿐입니다. 모리스 역할은 그 당시 제 나이대의 배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역할 중 하나였어요. (그런 역할을 맡게 돼서) 너무나 좋았을 따름이예요, 이 역할과 함께 제 커리어도 시작됐구요. 아시다시피 그런 걱정은 미국스런 걱정이죠, 미국 배우들은 게이 역할이나 약하게 비춰지는 역할을 연기하는걸 우려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국배우들은 그런 걱정을 많이 안하거든요.


HU: 휴, 루퍼트 (그레이브스)[각주:4]와는 어떤 추억을 갖고 계신가요? 촬영 당시는 많이 기억나시나요?


JW: 모두 기억해요 (웃음), 대단했죠. 휴는 대단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솔직면서도 웃긴 친구죠. 장난치기 딱 좋은 친구랄까, 루퍼트는 그냥 정말 솔직하면서도 놀라울정도로 따뜻하고, 열려있는 배우였어요. 모리스 캐릭터나 제가 모리스를 연기했던 방식에 있어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면, 모리스는 주변에 좌우되는 캐릭터였다는 거예요. 모리스는 끊임없이 이끌려 다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스토리에 있어 앞발보단 뒷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배우로서) 제가 할 일은 그냥 제게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는 걸 받아들이는 거였어요, 루퍼트나 휴 같은 배우들과 합을 맞추는 일은 좋았습니다.

 다른 멋진 배우들을 언급하자면, 잠깐 등장해서 경이로운 연기를 보여주는 뎀홈 엘리엇[각주:5]이나 사이먼 캘로[각주:6], 벤 킹슬리[각주:7]가 있었죠. 그런 역량있는 배우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저처럼 젊은 배우에겐 정말 환상적일 따름이었습니다.


HU: 30년 전 이 영화를 본 뒤 이 영화가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바꾸어 놨는지 사람들이 말할 때면 놀라시나요?


JW: 수백통은 받았을거예요, 특히 미국에서 말이죠. 많은 분들이 이 영화가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고, 자신감을 주었다고 말하더군요, 꼭 커밍아웃을 안 하더라도 자신의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줬다고요. 제가 받았던 팬레터들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론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어요. 누군가의 삶에 진정 변화를 가져온 영화에 출연했다는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메인스트림, 그것도 매우 전통적인 방식의 영화였다는 사실이 동성애자 관객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실패한 사랑과 성공적인 사랑, 두 가지 게이 러브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동성애자 관객들에겐 일종의 긍정으로 다가갔겠죠.


HU: 완전히 새로운 세대가 당신이 주연한 30년 전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건 어떤 느낌인가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각주:8]의 팬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기대해봐도 될까요?


JW: 오, 그럴것 같아요. 젊은 동성애자들의 사랑이란 점에서 ('모리스'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비슷한 테마를 가지고 있죠, 같은 사람이 각본을 쓰기도 했구요. 그런 점에서 '모리스'가 새로운 관객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거라 생각해요, 여전히 시대에 뒤쳐지지도 않았구요. '모리스'는 깊이있는 작품이예요, '하워즈 엔드'와 '전망 좋은 방'[각주:9]도 좋아하지만, 그 작품들은 '모리스'보단 거품이 낀 작품들이죠. 제 말은, 포스터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모리스'에서)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사회의 취약한 부분 아래를 제대로 표현해냈단 뜻이예요, '모리스'는 정말 그런 부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관객을 밀어부치고 재촉하기도 해요, 편히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죠.


HU: 영화는 계급제에 대한 아름다운 연구물이기도 해요, 촬영하실 때도 그렇다는걸 알고 계셨는지 궁금해요.


JW: 물론이죠! 포스터는 정말 뛰어난 작가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늘상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 원작을 바이블로 삼았어요. 포스터는 부드럽게 기득권의 민낯을 드러내게 하는 멋진 능력을 갖고있죠. '모리스'는 작가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었기 때문인지 작가의 그런 능력이 특히 더 잘 드러나는 소설이기도 해요, 소설 속 계급제에 대한 묘사도 훌륭하구요. 이 책이 정말 뛰어난 이유는 모리스가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점이예요, 제 말은 즉슨, (소설 속에서) 모리스는 빈민층에 대한 막말을 서슴치 않고, 스커더의 아버지가 동네 도살업자란걸 알고나선 정말로 역겨움을 느끼죠... (도살업자란) 생각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거예요, 하지만 소설 말미에는 하층민에 대한 그의 거부감이 그의 스승과 부모, 모든 사회가 모리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알려준 것에 불과하다는걸 깨닫고 모리스는 그걸 뛰어넘게 됩니다.


HU: 최근에는 '폴다크'[각주:10]에 출연하고 계신데,  드라마에 참여하신건 재밌으셨나요?


JW: 네, 재밌는 드라마죠. 각본도 좋고, 사랑스런 배우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좋습니다. 가서 제 분량만 하면 되기 때문에..(웃음) 조연 역할은 늘 조금 어색하게 느껴져요, 아시다시피 드라마의 스토리는 메인 캐릭터들 중심이라 (조연으로서) 주연배우들에 맞춰주다가 제 차례가 와야 몸 좀 푸는거 거든요.


HU: 마지막으로 현재 하고 계신 다른 일에 대해 말씀 좀 해주세요.


JW: 어, 들으면 웃을지도 몰라요, 왜냐면 제가 '모리스'연극을 연출하거든요. '어보브 더 스태그'란 작은 극장에서 상연하고 있다가 최근에 박스홀의 새로운 장소를 옮겼어요. 작지만 정말 아름다운 극장이죠, 리허설 공간이랑 사랑스런 바도 갖추고 있구요. 9월 중순쯤 '모리스' 상연을 시작할 예정인데, 이거 '모리스'가 절 괴롭히려고 돌아온 것처럼 보이네요. (웃음)

  1.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연인이자 제작자였던 이스마일 머천트와 많은 작품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특히 E. M. 포스터의 소설을 많이 영화화 했었죠. [본문으로]
  2. 아이보리 감독의 또다른 영화, '전망 좋은 방'의 주연배우. 공교롭게도 제임스 윌비 역시 '전망 좋은 방'에 단역으로 잠깐 출연한 바 있습니다. [본문으로]
  3. '모리스' 이전에 둘은 이미 함께 작업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4. 스커더 역할을 맡은 배우. [본문으로]
  5. 배리 박사역. [본문으로]
  6. 듀시 선생님역. [본문으로]
  7. 레스커-존스역. 최면술사. [본문으로]
  8. '모리스'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본을 집필해서 2018년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과 공동 연출까지 생각했으나 연출에는 손대지 않았죠. [본문으로]
  9. E. M. 포스터의 또다른 작품들. 제임스 아이보리-머천트 이스마일에 의해 두 작품 모두 영화화 되었습니다. [본문으로]
  10. 윈스턴 그래햄의 소설을 영상화한 영드. [본문으로]
:

 *본문에 영화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주의해주세요.

 블록버스터로써 나쁘진 않습니다. 다만 1편과 2편 성공의 일등공신인 제임스 카메론의 복귀[각주:1]로 시리즈 팬들의 기대치를 한껏 올려놓은 것치곤 실망스러운 작품입니다. 1편과 2편의 호러/스릴러적 요소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스토리적으로는 2편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신선함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크 페이트의 가장 큰 패착은 애매한 세대교체에 있습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의 복귀는 다크 페이트에서 '득'이 아니라 '실'입니다. 원년 멤버들의 복귀가 화제성 측면에서 영화의 홍보나 초반 흥행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스토리상 사라 코너와 T-800의 이야기와 신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엮는 과정에서 신 캐릭터들이 피 봤습니다. 특히 새로운 사라 코너+존 코너 역할을 맡은 대니 라모스일 경우 부득이하게 사라 코너와 캐릭터가 겹치면서 도무지 활약할 구석이 하나도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니역할 배우가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한 게 뭐냐 식으로 비판하는데 대니가 아무것도 안 한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대니가 할 일을 사라가 대신해주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미래의 저항군 리더로서 리더십을 보여줘야할 인물은 대니인데 영화 속에서 정작 주인공 일행을 이끄는건 사라 코너가 다 하기 때문이죠. 대니 캐릭터가 2편의 사라 코너가 아닌 1편의 사라 코너라 봐도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입니다. 대니가 1편의 일반인 사라 코너 포지션이었다면 Rev-9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대니에게 동기를 부여했어야 하는데 다크 페이트는 이 과정에 사라 코너와 T-800의 이야기를 우겨넣다 보니 대니의 여정,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지 못합니다. 결국 영화를 보고나면 이게 대니의 이야기인지 돌아온 사라 코너의 이야기인지 애매해지는거죠.

 대니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신 캐릭터, 그레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레이스가 전면에 나서서 Rev-9와 맞붙어야 관객들이 이 캐릭터에 더 몰입할 수 있을텐데 그레이스가 조금이라도 활약하겠다 싶으면 어김없이 사라 코너가 끼어들고, T-800이 끼어듭니다. 그레이스는 대니에 비하면 액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좀 더 존재감은 있었으나 역시나 비중문제에선 구 캐릭터들로 인해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신 캐릭터들 중 가장 호감이었는데다 캐릭터 자신만의 개성도 뚜렷하고, 대니보다 나은 자신만의 스토리까지 갖추고 있었음에도 결국 엔딩에 가선 죽어버리는게 무척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캐릭터가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것도 억울한데 후속편에 출연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애버리다니, 이건 분명한 실책입니다.

 차라리 후반부에 사라 코너와 T-800이 협공해서 Rev-9을 막고, 대니와 그레이스를 살려야 했습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생존자는 사라 코너와 대니 라모스인데 이건 뭐 세대교체를 한 것도 아니고, 안 한것도 아니고 애매한 맛만 남겨버렸습니다. 호쾌한 액션을 위해서라도 그레이스와 대니 콤비가 남는게 더 나았을텐데 대체 무엇 때문에 할머니가 다 되가는 사라 코너와 대니를 붙여둔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 시작부터 존 코너를 죽일 패기는 있었으면서 왜 끝까지 사라 코너는 놔주지 못한건지 모르겠더군요. 차라리 사라 코너와 T-800, 노장들의 희생으로 새로운 세대가 살아남고 어두운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이런 결말이 훨씬 깔끔했을텐데 말이죠.

 새로운 캐릭터들로 확실하게 세대교체를 이루고, 프랜차이즈를 확장하고 싶었다면 신 캐릭터들에게 스토리의 초점을 맞추고, 적절한 러닝타임을 할애했어야 합니다. 다크 페이트는 올드팬과 새로운 관객을 모두 잡으려고 욕심만 부리다가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가 되버린거 같아 무척 아쉬웠습니다.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1, 2편의 주제적 측면을 계승하는 것이지, T-800과 사라 코너가 아닙니다. T-800과 사라 코너만으로 시리즈를 계속 하기엔 세월이 너무나 흘러버렸고 두 배우의 체력적 한계도 너무 명확합니다. 특히, 시리즈의 간판이라 볼 수 있는 T-800 역시 앞서 만들어진 속편들에서 이미지 소비가 너무 많았습니다. 다크 페이트는 새로운 피 수혈을 통한 세대 교체의 기회를 추억팔이에 놓쳐버렸고, 시리즈의 미래는 어느때보다 암담합니다. 어쩌면 시리즈의 운명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또다시 안전함을 추구하다 놓친 격입니다. 영화의 부제와 마찬가지로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미래에도 '어두운 운명(Dark Fate)'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1. 물론 스토리와 각본 한정이지만, 그가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으로]
: